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인궤 (문단 편집) == 생애 == 변주 울지 사람으로 어릴 때 가난했지만 학문을 좋아했고 640년에 진창현위를 지내다가 절충도위 노녕이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노녕이 높은 관직을 믿고 거만하게 굴면서 모욕하자 그를 때려죽였다. 이로 인해 장안으로 압송되었고 유인궤는 백성들 앞에서 능욕했기에 분해서 죽였다고 했다. [[위징]]이 [[수나라]]가 망한 까닭을 이야기하면서 유인궤를 죽이는 것을 말려서 죽지않았으며 역양현승에 임명되었으며, [[태종(당)|당 태종]]이 동주에 사냥을 나가려고 하자 이에 대해 충고해 칭찬을 받아 신안현령으로 승진되었다. 정관 연간[* 627 ~ 649년이다.]에 급사중에 올랐다가 656년 8월에 순우씨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죄를 범해 감옥살이를 했다가 이의부가 그 여자의 미모가 뛰어나는 것을 알고 옥리 필정의에게 석방해주도록 했다. 그 여자가 석방되어 왕의방이 그 일을 고발하고 이의부는 이 일을 모른 척 하면서 필정의를 문책했으며, 필정의는 그 압력에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유인궤는 이 일을 법대로 처리하려 해서 이의부가 이를 원망해 유인궤는 청주자사로 쫓겨났는데, 660년에 [[백제]]를 공격하게 되자 바다에 배를 띄워 군량을 운반하게 되었고 그 때 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의부의 독촉으로 운송했다가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혔다. 이 일로 인해 평민이 되었고 [[백제]]를 공격하는 원정에 [[백의종군|백의를 입고 종군]]했으며, 661년에 [[백제부흥군]]과 싸울 때 대방주자사에 임명되어 [[유인원(당나라)|유인원]]이 [[사비성]]에서 포위되자 유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구원했다. 유인궤는 군사를 통제하는 것이 엄정하고 돌아다니면서 싸워 향하는 곳마다 모두 떨어졌으며, 백제부흥군이 웅진강 입구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자 [[신라]]의 군사들과 함께 격파했다. 백제부흥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662년에는 [[유인원(당나라)|유인원]]과 함께 백제부흥군의 지라성, 윤성, 대산, 사정의 성책을 부쉈다가 7월 30일에 유인궤와 함께 백제부흥군을 공격해서 웅진의 동쪽에서 물리치고 진현성을 함락했다. 663년에는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과 [[왜국]] 구원군의 연합군을 만나 네 차례 싸워서 모두 승리해 왜군의 배 400척을 불살랐으며, [[흑치상지]], [[사타상여]] 등이 투항하자 그들에게 아직 남아서 저항하는 백제부흥군의 [[임존성]]을 함락시키는 일을 맡겨 임존성을 함락했다.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후 유인궤는 그 지역을 수습했고 이 때의 공으로 여섯 급의 품계로 올려졌다가 대방자사에 임명되었으며, 상관의는 유인원과 함께 유인궤을 칭찬하면서 유인궤에 대해 쫓겨나 관직을 삭탈당했으니 충성을 다할 수 있었다면서 군자라 할 만하다고 했다. 664년에 검교웅진도독을 지내고 있다가 귀국하려고 했지만 유인원이 이를 만류하면서 충고하자 그대로 백제 지역에 머물렀으며, 665년 8월 13일에 신라, 백제, 탐라, 왜 등의 사자를 바다에서 태워 당나라로 가게 했다. 666년에는 대사헌, 검교태자좌중호를 지내다가 우상, 지정사 등을 역임했으며, 668년에는 요동도부대총관이 되었고 670년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했다. 그러나 신라와 당 사이에 [[나당전쟁]]이 진행되자 다시 복직해 674년에는 좌서자, 동중서문하삼품을 지내다가 계림도대총관에 임명되어 신라를 공격, 675년 [[칠중성 전투|칠중성을 함락]]한 이후 귀국했다. 이 칠중성 전투의 공으로 직후 [[공작(작위)|공작]]으로 작위가 오르고 재상급 지위인 [[좌복야]]에 임명되었다. 677년에 [[티베트]]에서 발흥한 [[토번]]과 맞닿은 도하도(洮河道) 행군진수대사(行軍鎮守大使)가 되었다. 이후 지휘관이 이경현으로 교체되었다.[* 이경현으로 교체된 이유는 이경현에 대한 유인궤의 원한 때문이다. 유인궤가 조정에 건의를 올릴 때마다 이경현의 반대를 받자, 유인궤는 이경현에 대해 앙심을 품었다. 유인궤는 이경현이 변경을 맡을 장수가 아님을 알면서도 이경현을 원망했기 때문에 상소를 올려 결국 지휘관이 이경현으로 교체되었다.] 681년에는 상서좌복야, 동중서문하삼품을 지내다가 태자태부를 겸임하게 되었다. 유인궤는 상서좌복야에서 물러났고 태자태사를 겸임하며 정무에 참여하였다. 682년에는 고종이 낙양으로 거둥하면서 [[배염]], 설원초와 함께 장안에서 태자 이현을 보좌하였다. 이후 이현이 낙양으로 가면서 다시 이중복을 보좌하여 서경 부유수를 맡았다. 683년 12월 21일에는 특진이 더해지고 좌복야에 임명되었으며, 684년에는 서경 유수를 맡고 685년에 문창좌상, 동봉각난대삼품으로 지냈다가 사망하였다. 사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병주(并州) 대도독으로 추증되었고 집안에 실봉 300호를 하사받았다. [[중종(당)|중종]]이 즉위한 뒤에는 태위로 추증되었고, [[현종(당)|현종]] 개원 연간에는 유인궤의 손자인 유면(劉冕)이 주청하여 현종이 유인궤의 비석을 세워주고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