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인석 (문단 편집) === 부정적인 평가 === 유인석은 자신의 최고 신념이었던 위정척사까지도 더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된 1910년대 이르러서도 봉건적 복고 세계관을 결코 버리지 않았으며, 그것만이 정의이고 반드시 다시 구현해야 할 사회 정의이자, 정확히 말하자면 '진리'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찌보면 [[위정척사]]의 대표격인 [[최익현]]보다도 더 극단적인 복고를 외쳤던 인물이었다. 결국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격동의 시대에서 뒤쳐지고 구시대적인 자신의 길만을 고집했다가 실패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인석은 신분제도, 중화사상 지지로 비판받으면서 그중에서 위선적인 행동과 위법행위를 저지른것이 가장 심하게 비판받는다. 먼저 관찰사 김규식, 천안군수 김병숙, 평창군수 엄문환을 처형한 것이다. 물론 유인석이 평생 중화론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개화를 극도로 증오한 것을 고려해 볼때, 그가 김규식, 김병숙, 엄문환을 처형한 것은 모순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이 세 관료가 단발령을 강행했다는 것 자체가 인륜을 파괴하고 조선을 금수의 세상으로 만드는 최악의 범죄 행위라고 봤다. 이는 그가 '의암집'에서 "[[을미사변]]은 조정 대신들이 처결해야 할 문제지만 [[단발령]]은 모두의 문제다."라고 밝힌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단발령은 중화 질서를 유일하게 간직한 조선을 서양 오랑캐와 비슷한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었고, 공맹과 주자가 이어온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비록 존왕양이를 숭상하는 입장이었지만 고종의 연호인 '광무'와 순종의 연호인 '융희'를 "개화파가 붙여준 연호"라는 이유로 단호히 거부했던 그였기에, 왕이 임명한 관료라는 사실보다 단발령을 시행해 '조선을 금수로 만들어버린'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유인석은 위선적인 행동과 위법행위는 당시에도 비판 대상이었다. 관찰사 김규식, 천안군수 김병숙, 평창군수 엄문환을 친일파로 몰고 있지만 실제론 김규식, 김병숙, 엄문환은 일본과 내통한 정황이 없고 유인석이 그들을 살해한 이유도 그저 단발령을 강행했다는 이유뿐이다. 당시 김규식과 김병석, 엄문환은 지방 관원으로 당연히 중앙의 명령에 따르는 입장일 뿐인데다 단발령 시행과 친일은 관련없는 사안인 만큼 유인석이 관료들을 살해하고 다니는 건 어떠한 정당성도 없는 반역에다 살인 행각일 뿐이다. 이런 건 존왕양이 정신의 척화사상에 위배된다. 아무리 그래도 동학도를 배척했으면서 자신도 동학도와 같이 지방관료를 그것도 악질 탐관오리가 아닌 황제가 임명한 일반 관료를 함부로 처형하였기에 같은 척사파이자 존왕양이파인 최익현보다 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최익현도 유인석과 마찬가지로 수구적이었지만 역신과 매국노가 아닌 이상 황제가 임명한 일반 관료는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인석은 의병 활동 당시에 평민 출신의 의병 지휘관인 김백선을 독단으로 처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사건 자체는 조금 더 복잡한 사건이었는데, 김백선이 항명한 안승우는 유인석과 달리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양반 가문 출신의 의병장으로 후에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장이었다. 김백선의 원군 요청을 안승우는 '대장을 옹위해야 하는 중군의 소임 때문에 병사를 함부로 뺄수 없다.'며 무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크게 패한 김백선은 격분하여 원군을 안 보냈다며 안승우의 면전에서 칼을 빼들고 항명하다가 군기 문란죄로 처형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칼을 빼들고 항명하였다고 해도, 김백선의 지휘계통상 직속상관인 안승우가 처벌할 일이지 총사령관도 아니고 옆부대 지휘관인 유인석이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래서 이는 명백한 직권남용에다 공식적인 재판이나 절차에 따르지 않은 사적제재와 살인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 갑오개혁으로 개선된 형법 기준으로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게다가 유인석은 김백선을 처벌하면서 '그대는 본시 한낱 포수에 불과한 상민이었거늘, 어찌 분수를 모르는가? 여봐라! 저자를 군령위반 죄로 다스려서 포살하라!' 라며 의병들이 보는 앞에서 이를 그대로 이야기하며 처벌하는데 사실 어딜봐도 단순히 군령위반으로 처벌했다기 보다는 신분제를 중시했던 유인석의 한계가 강하게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단순히 유인석이 양반 신분을 이용하여 싫어하는 평민 출신 지휘관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고 평민을 대놓고 아랫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로 인해 제천 의병 등 다른 평민 출신 의병들이 유인석의 행위에 크게 반발해 대거 이탈하면서[9] 의병은 결국 패배하게 된다. 사실 일본군에게 패퇴할 당시 김백선은 원군을 요청했지만 안승우는 대장을 호위해야 하는 중군의 소임 때문에 원군을 보낼 상황이 못 되었고, 그래서 대신 다른 의병장들이 원군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보내겠다고 해놓고 결국 보내지 못했거나, 기껏 보낸 원군이 정작 전투를 기피하고 퇴각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때문에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대거 잃고 패하여 분노한 김백선은 알려진 대로 본영으로 돌아가 안승우에게 칼을 빼들며 따지며 분노했고, 진작부터 김백선을 곱지 않게 보던[10] 유인석은 군율 위반을 이유로 김백선을 처형했다. 또한 당시 상황상으로 안승우가 지키는 지역은 방어에 유리한 제천성으로 일본군에게 빼앗길 경우 허리가 잘리는 모양이 되어 심각하게 불리해질 수 밖에 없으며, 실제로도 김백선 처형이후 일본의 재공세에 함락되어 안승우도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처형당하게 될 정도로 공세가 강하게 집중된 지역이었다. 군 지휘계통과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때, 처형까진 아닐지언정 처벌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즉시처형이라는 가혹한 조치로, 의병 내의 양반과 평민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평민 출신의 포수들과 농민들이 김백선의 처형에 반발하며[11] 양반 의병장 지휘에서 대거 이탈하여 독자세력을 만들었고 이는 가뜩이나 허약한 의병세력의 분열을 초래하여 의병이 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유인석이 "나라가 망하더라도 공맹과 주자가 이어간 오랜 질서를 지키는 것이 중하다."는 사고관을 끝까지 고수한 데서 비롯되었다. 군사적으로 유능한 평민들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외적에 대항하는 것은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김백선의 일을 그대로 묵과해버린다면 차후에도 비슷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평민이 양반을 우습게 보는 등 신분질서가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다. 개화파를 조선을 금수로 만든 역적으로 여기고 개화파가 실시한 갑오개혁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그는 갑오개혁으로 인해 신분제가 철폐된 것 역시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김백선을 처형한 건 유인석의 입장에선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 의병은 단합해도 승패를 장담할수 없는 상황에서 유인석이 독단으로 김백선을 처형하는 월권행위를 저지르고 본인의 봉건적인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어 의병들의 반감을 크게 사게된것은 의병의 단합을 파괴하는 행위였으며 이는 의병을 실패하게 만드는데 큰 원인을 제공한터라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실책이다.[12] [1] 27세손 석(錫) 항렬. 유관순 열사 및 유관순 열사의 오빠 유우석(柳愚錫)과 같은 항렬이다. [2] 인근의 발산리와 함께 고흥 류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유봉석·유중악·유하석·유홍석도 이 마을 출신이다. [3] 이때 중국에서 반일운동가로 활동하자 그에게 분노한 일본에서 암살자들을 파견하여 암살을 시도했으나 유인석이 사전에 도주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4] '의암집(毅庵集)' 부록 '년보(年讀) 699쪽. [5] 독립유공자 한기수와 동명이인이다. [6] 회비경송(會秘警送) 제 706호(1908년 11월 22일) [7] 용연김정규일기(龍淵金鼎奎日記) 1910년 3월 7일자 기록 [8] '소의신편' [9] 특히 제전의병의 핵심적인 간부였던 민의식과 서석화가 가장 심하게 반발하며 김백선이 처형된 다음날에 바로 휘하 병력들과 함께 의병을 이탈했다. [10] 당시 유인석 진영에서는 김백선이 유인석이랑 의병 수뇌부와의 갈등이 심하여 자기가 이끌던 포수들과 함께 독립을 한다느니, 심지어 김백선이 윗선을 다 엎어버리고 자기가 대장이 되려 한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돌았다. [11] 특히 조선의 신분제는 1894년에 법적으로 폐지되었기에 유인석이 이를 알면서도 김백선을 양반에게 항명한 죄로 처형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의병 지도부가 월권행위를 저지른 유인석을 처벌하지 않다보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12] 초반에 제천의병의 숫자가 3500명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 유인석이 의병을 해산시킬때까지 남아 있었던 제천의병이 초기의 10%도 안되는 219명에 불과했다. 특히 다른 의병들도 유인석에게 협력하는것을 끝까지 거부했고 유인석이 의병을 해산시킬때까지도 협력하지 않았다. 이만큼 유인석의 행위가 의병들한테서 분노를 크게 샀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