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자명 (문단 편집) === 베이징에서의 의열투쟁 === 이무렵, 베이징에서는 아나키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있었다. 베이징대학 총장으로 취임한 [[차이위안페이]]는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을 주도하던 리스청, 우즈후이(吳稚暉) 등을 베이징대학 교수로 초빙해 청년들에게 아나키즘을 가르치게 했으며, [[천두슈]], [[리다자오]], [[루쉰]], 저우쭤런(周作人), 저우젠런(周建人) 형제 등도 초빙해 공산주의를 가르치게 했다. 이리하여 베이징 대학은 새로운 학문연구와 신문화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 베이징 한인 유학생은 약 300명에 달했는데, 주로 베이징대학에 다녔다. 특히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이후 일제의 학살을 피해 중국으로 달아난 한인 유학생들은 사상이 다양하고 언론도 비교적 자유로운 베이징으로 대거 이동했다. 유자명은 이러한 흐름에 주목하고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담했다. 하지만 이 단체는 <정의공보>를 한글로 발행한 걸 제외하면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고, 유자명은 별도로 아나키즘에 경도된 한인 청년들을 규합해 다물단을 결성하여 의열투쟁을 이끌었다. 다물단은 독립운동의 장애물인 일제의 정탐 제거를 목표로 삼았다. 당시 일제는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조직에 대해 철저한 감시와 파괴를 진행했고 베이징에서도 밀정을 파견해 감시를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밀정을 처단하는 것은 독립운동조직을 보존하고 조직원의 생명과 활동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1925년 3월 30일, 다물단은 유자명의 감독하에 일제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했다. 당시 베이징에서 발행되던 중국 일간신문 <경보(京報)>는 김달하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달하란 자는 한국인인데 일본의 사냥개 노릇을 한다고 이름이 났다. 그는 베이징에 몇 년 동안 있으면서 전적으로 한국독립군의 비밀을 정탐하여 일본인에게 보고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한국독립군은 그 사람의 행실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일찌감치 이런 사냥개를 죽여 후환을 없애려고 하였다. 유자명은 또 1926년 12월 28일 서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의거를 기획, 지도했다. 유자명은 신채호와 함께 베이징에 있을 때 나석주를 만났다. 나석주는 의열투쟁에 대한 결의를 보이며 “폭탄과 권총을 가지고 서울에 가서 일본 원수 놈들과 싸우다가 최후의 탄환으로 자결하려 하니 누구든 나를 도와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유자명은 그를 의열단에 가입시키고 폭탄 한 개와 권총을 구입한 뒤 톈진에서 나석주와 만나 작전 계획을 설명하고, 그가 서울로 떠날 때 마지막까지 그를 전송했다. 이후 그는 의거 직후 순국한 나석주를 기념하는 글을 의열단 간행물에 발표하고 추모회를 조직하고 나석주의 약력과 의열투쟁을 소개한 소책자 100부를 인쇄해 배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