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자명 (문단 편집) === 교육활동과 남화한인청년연맹 === 1926년 의열단 개조회의 이후 광저우 중산대학에 머물고 있던 유자명은 1927년 4월 15일 중국 국민당이 광저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산당원들을 대거 숙청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에 유자명은 1927년 5월 14일 <조선일보>에 '적색의 비통' 기사를 게재해 [[장제스]]를 비판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까지도 혁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민중을 위하고 혁명을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실제로는 민중과 혁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시키려는 자가 있다. 이후 그는 김원봉과 함께 광저우를 탈출해 상하이로 가다가 해적을 만나 총상을 입기도 했지만 어렵사리 우한에 도착했다. 그는 1927년 6월 우한에서 개최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 [[김규식]], 이검운(李劍運)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했다. 이듬해 2월 한커우로 이동한 유자명은 김병태, 최원, 최승년 등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인도 회원 나란신(那蘭辛)의 밀고로 2월 28일 우한공안국에 구속되었다. 우한위수사령부 간수소에 구속된 그와 동지들은 조소연(趙素昻)과 박건웅(朴健雄)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공문을 발송하고 우한공악국과 교섭을 벌인 덕분에 6개월 만인 8월 28일에 석방되었다. 유자명은 석방 직후 난징으로 이동하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사무실에 거주하면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쑨원의 저서 <쑨원학설>을 한글로 번역한 그는 국민당 선전부장 예추창(叶楚傖)을 소개받았고, 이때부터 난징에서 중국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29년 봄, 그는 중앙통신사를 경영하는 위안샤오셴(袁紹先)으로부터 한푸옌(韓㚆炎) 열사 기념 합작농장에서 농업 생산을 지도하는 농업기술자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그는 생계가 어려웠기에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농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면서 점차 교육계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유자명은 수원농림학교 출신으로 전문적인 농업지식과 기술을 지녔으며, 중국어 회화와 문장이 능숙해 중국 인사들과 원활하게 교류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푸젠성 취안저우에 있는 리밍 중학교에서 생물학을 가르치게 되어 난징을 떠나 푸젠으로 갔고, 그곳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1930년, 그는 다시 상하이 리다학원 농촌교육과로 이직했다. 중국의 저명한 교육가 쾅후성(匡互生)이 세운 리다학원은 교육과 생산노동을 서로 결합하는 방법으로 학생들을 교육했다. 그는 이곳에 부임한 후 학생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유자명은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참가했다. 유자명은 훗날 이 단체가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공개단체라고 회고했고, 정화암도 기존에 있는 비밀조직 산하에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고 회고했다. 이는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을 표면에 내세워 비밀을 유지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자유연합을 기본 원리로 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종교와 가족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독립을 쟁취한 이후 조선에 세워질 절대 자유 평등의 새로운 사회를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 단체는 민중의 직접적인 불굴의 행동으로 봉기를 일으켜서 일거에 일본 제국주의를 조선에서 축출하자고 주장하면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구성원은 대략 30여명 정도로 추측되며, 유자명과 이회영, 류기석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만주사변으로 상하이로 돌아온 만주 한족총연합회의 정화암, 백정기, 김지강, 오면직 등이 합세했다. 여기에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들어온 [[원심창]], [[박기성]], [[나월환]] 등도 가입했으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 활동하던 [[이강훈(독립운동가)|이강훈]], 이달, [[엄순봉]] 등도 합세했다. 유자명은 이회영의 추천으로 의장 겸 대외 책임자로 선출되었으며, 리다학원을 근거지로 삼아 그곳을 아나키스트들의 집회 장소 겸 연락지점으로 삼고 항일의열투쟁을 전개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중국 동지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1년 11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간부인 [[왕야차오]]와 화쥔시(華均實)의 제안으로 일본인 동지 전화민(田華民)과 오수민(吳秀民) 등을 포함해 한, 중, 일 3국의 항일구국연맹이 결성되었다. 항일구국연맹은 적의 기관파괴와 요인암살 · 친일분자 숙청 등을 목표로 삼아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유자명은 항일구국연맹의 선전부를 책임지고 기관지 <자유>를 발행해 아나키즘을 선전했다. 그러나 항일구국연맹을 주도하던 왕야차오가 국민정부의 탄압으로 1932년 5월 홍콩으로 도피하게 되면서 항일구국연맹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이회영은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재건설하기로 마음먹고 국민당 지도인사 우즈후이와 리스청을 만나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한 뒤 창충에 있는 사위 장기준(張基俊)에게 연락해 지하조직을 건설하고 주변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유자명은 이회영이 70세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만주로 가려는 것을 만류했지만 그의 결심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 그는 난징으로 가서 리스청, 우즈후이 등을 만나 이회영이 동북 만주의 군벌과 서로 연락하여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비밀연락망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회영은 단신으로 만주로 갔다가 1932년 11월 다롄항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 옥사했다. 유자명과 남화한인청년연맹 동지들은 이회영이 체포된 경위를 추적하다가 그의 조카 이규서(李圭瑞)와 연충렬(延忠烈)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자 두 사람을 상하이 리다학원으로 유인한 뒤 밀고 사실을 확인하고 처단했다. 또, 이규서, 연충렬의 배후에 상하이 거류민단 회장 이용로(李容魯)가 있다는 것도 밝혀지자, 유자명은 엄순봉과 [[이규창(독립운동가)|이규창]]을 시켜 1935년 3월 25일 이용로를 자택에서 쏴 죽이게 했다. 이때 체포된 엄순봉은 사형에 처해졌고 이규창은 징역 13년에 처해졌다. 유자명은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계획 수립과 거사 준비에도 참여했다. 아리오시 아키라는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 사디오가 건네준 4천만 엔을 가지고 중국 국민당 요인들을 매수해 만주 지역을 포기하게 만들려 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1933년 3월 17일 일본 고급 음식점 육삼정에서 아리오시 아키라 공사와 국민당 요인의 밀회가 성사되고 밀약을 자축하는 연회가 개최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유자명은 백정기와 이강훈을 암살 실행자로 선정했고, 원심창에겐 현장안내를 맡겼다. 그는 정화암에게 거사준비자금으로 200불을 지급했으며, 거사 직후에 각 신문사에 보낼 선언문을 작성했다. 유자명은 매일 아침 백정기와 이강훈을 찾아가 아침식사를 같이하며 격려했고, 거사 당일인 3월 17일 전세택시를 빌려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오면직과 같이 타고 육삼정 부근에서 세 사람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나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은 사전에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에게 모두 체포되었다. 하지만 상하이, 베이징, 난징, 톈진 등의 신문들이 아리요시 아키라 공사 암살미수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그의 음모가 세상에 폭로되었다. 유자명은 체포된 세 사람을 돕기 위해 리다학원의 중국인 제자 챵어강(常爾康)으로 하여금 그들을 뒷바라지하게 하고 필요한 책도 반입시켜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