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장(삼국지) (문단 편집) === 익주목 유장 === [[유언(삼국지)|유언]]의 사망으로 익주에 구심점이 사라지자 [[조위#s-1]](趙韙)[* 조씨의 [[위(삼국시대)|위나라]]를 말하는 게 아니라 호족 이름으로 이 사람은 나중에 모반을 일으킨다.] 등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받아 조정으로부터 감군자사 겸 익주목으로 임명받게 된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익주 땅을 다스리게 된다. 영웅기에 따르면 유언이 죽자, 아들 유장이 대신하여 자사가 되었는데 장안에서 영천사람 [[호모(삼국지)|호모]](扈冒)를 배수하여 자사로 삼아 [[한중]]으로 들어가게 했다. 한편 [[형주]]의 별가(別駕) [[유합(삼국지)|유합]](劉闔)은 유장이 거느리던 [[심미]], [[누발]], [[감녕]]이 반란을 일으키자, 때에 맞춰 유장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패주하여 형주로 달아났다. 유장이 조위를 시켜 형주로 진공하여 구인에 주둔했다.[* 해당 부분의 영웅기 원문은 '朐䏰。上蠢,下如振反'으로 '구인. 앞 글자는 준, 뒷글자는 여(如)와 진(振)의 반절로 발음한다.'는 뜻이다. 파성넷에도 생각보다 오역이 많으므로 주의가 요구된다.] [[영웅기]]에 이르길 [[방희]]와 유장은 예전의 우의가 있었고, 유장의 여러 아들을 방희가 난에서 구해주었기에, 유장은 방희를 후덕하게 대해주고, 방희를 파서태수로 삼게 하였는데 방희가 권세를 제멋대로 하였다고 한다. 후에 방희와 유장의 우호관계에 틈이 나자, 유장을 옹위했던 조위가 병사를 일으켜 안에서 호응하여서, 사람들은 흩어져 죽음을 당했으니, 이것은 유장이 명쾌하게 결단함은 적으면서 밖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앞서 [[남양]](南陽), [[삼보]](三輔) 사람들이 수만 가가 익주로 흘러 들어오자,[* [[법정(삼국지)|법정]] 역시 이때쯤 관중에서 익주로 피란온 사람이다.] 이들을 거두어 병사로 삼고, 동주병(東州兵)이라 불렀다.[* 남양과 삼보지역은 익주에 비해 동쪽에 있다.] 유장의 성품은 너그럽고 유순하며, 위략(威略)이 없어, 동주 사람들은 예부터 있던 익주의 백성들을 침탈하고 폭행했지만, 유장은 능히 막지 못하고, 정령(政令)은 빠진 게 많아, 익주 사람들은 자못 원망을 품었다. 조위는 본래 인심을 얻고 있었고 유장을 옹립했었기에, 유장이 그에게 위임했었는데 이 꼴을 보고 조위가 딴 마음을 품었는지 백성들의 원망을 틈타 모반하여, 이에 형주에 뇌물을 보내 [[강화]]를 청하고, 몰래 주중의 대성(大姓) 호족들과 연계하여, 이들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돌아서 유장을 공격했다. 촉군, 광한, 건위군이 모두 조위에 호응하였다. 유장은 성도로 달려 들어가 성을 지키는 꼬락서니로 전락했는데, 동주병들은 조위를 두려워 해, 모두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아 죽을 힘을 다해 유장을 도우니, 마침내 반란군을 격파하고, 조위를 [[강주]]까지 역공하니, 조위의 장수 방락과 이이가 모반하여 조위군을 참살하고, 조위를 참수했다. 이렇게 유장 치세의 익주는 유장을 익주목으로 세운 사람이 호족들과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개판 5분전이었는데 유장은 [[유언(삼국지)|유언]]처럼 익주를 휘어잡을 [[카리스마]]와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유장의 통치기의 익주는 혼란기를 겪게되었다. 유언이 끌어들인 중원에서 전란을 피해 들어온 유민집단과 토착 호족, 북쪽의 [[강족]], [[저족]]과 한중의 [[오두미도]] 그리고 남쪽의 [[만족]]들이 제각기 얽히게 된다. 이들을 한 데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익주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때는 [[성도]]가 포위되어 유장은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사실 [[장로(삼국지)|장로]]와 오두미도 역시 유언이 끌어들인 세력으로 유언은 장로를 후원하여 한중에 안정적인 기반을 갖도록 했다. 그런데 장로는 점차 교만해지고 방자해져 유언을 계승한 유장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이에 유장이 장로의 모친([[노씨(삼국지)|노씨]])과 동생들을 죽이고 [[방희]] 등을 보내 장로를 공격하게 했으나, 수차례 격파되었다고 한다. 장로의 [[부곡]]들이 파서(巴西)에 많이 있었기에, 방희를 파서태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장로를 막게 했다. 그럼에도 장로는 파군과 한중군에서 거의 30년간 제패했으니 장로를 막는데는 실패한듯 하다. 익주는 지금의 [[쓰촨성]] 일대로, 분지다. 분지는 넓은 평야가 험준하고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쪽에 자리 잡은 곳이었으므로 연중 따뜻하여 사계절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부유하고 축복 받은 땅이었기에 누구나([[손권]], [[유비]] 등) 탐을 내는 곳이었다. 그러나 유장의 통치는 법령이 해이하고 기강이 서지 않아 혼란하여[* 제갈량은 입촉 후 이렇게 기강이 서지 않은 촉의 법령을 바로잡고 해이한 법령을 바로 잡으면서 촉을 안정시키고 법치를 확립하였다.] 이런 장점을 발휘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오히려 익주의 지형의 이점이 아니었다면, 다른 [[군벌]]에게 치이고 까지며 땅을 내어주고 말았을 것이다. 아무튼 유장은 겨우겨우 익주 통치를 계속했다.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려 한다는 얘기를 듣자 3백 명의 수인(叟人) 이민족 병사와 물자를 지원하여 조조에 복종하려는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3번 째 사자로 보냈던 [[장송]]이 [[적벽대전]]을 앞두고 자신감에 차있던 조조로부터 무시를 당하게 되었고, 이에 원한을 품고 돌아와서는, 아예 [[적벽대전]]에 패배한 조조의 세력이 밀려나자 조조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유비와 연합할 것을 진언하였다. 그래서 이번엔 유비에게 병사 수천 명과 온갖 물자 등 막대한 선물을 하게 된다. 한편, 유장의 나약함에 실망하고 있던 막하의 몇몇 관료들은 다른 힘있는 이에게 익주를 넘기려 한다. [[장송]]과 [[법정(삼국지)|법정]]이 이를 주도했다. 이러한 생각 아래에 그들은 형주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유비]]에게 익주를 넘기겠단 음모를 꾸미고는 적당한 기회를 기다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