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장(삼국지) (문단 편집) === [[유비]]의 익주 입성 === 211년, [[조조]]가 [[한중]]의 [[장로(삼국지)|장로]]를 정복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게 된다. 이에 유장은 조조가 장로의 물자를 얻어 익주마저 병합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게 된다.[* 결국 조조는 기어이 장로를 격파하여 한중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 때쯤 유장은 익주를 유비에게 빼앗기고 아무것도 못하는 신세가 된 후지만 말이다.] [[장송]]은 유장에게 유비는 유장과 같은 한실의 종친이며, [[조조]]와는 원수 관계이고, 용병 실력이 뛰어나니,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토벌하도록 하면, 조조가 익주를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며 설득했다. 유장은 이를 그럴듯하게 여겨 유비를 불러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는 유비가 혈통을 사칭했다는 헛소리에 대한 반박 증거 중 하나다. 유비의 혈통이 가짜면 장송이 유장을 속이려고 혈통을 들먹이지 않았을 것이고, 유장 역시 친족도 구분하지 못하는 인물이 아니기에 장송의 말에 낚였던 것이다. 설령 그 정도로 멍청이라 해도 당시 조조조차 "돗자리나 짜던 놈" 이라는 식으로 말했지 "황족을 참칭하는 놈" 이라고 하지 않았으니 이쯤되면 증거 100%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법정에게 병사 4천으로 맞아들이게 했고 유비는 수만명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다. 이때, [[황권]]과 [[왕루]]는 유비를 불러들이는 것을 말렸으며, 특히 왕루는 성문에 거꾸로 매달리기까지 하며 결사반대했고 [[화양국지]]에 따르면 결국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삼국지연의]]에서 각색이 좀 들어가서 황권은 유장의 옷자락을 물면서까지 붙잡았지만 화가 난 유장이 옷을 잡아당겨 앞으로 넘어져 앞니 2개가 부러졌고, 왕루는 성문 위에 몸을 묶고 사정까지 하였지만 유장이 들어주지를 않자 스스로 몸을 묶고 있던 줄을 끊어 자결까지 하는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유장은 그런 험한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의견을 고집해 유비를 불러들인다. [[법정(삼국지)|법정]]과 [[장송]]이 유비를 찾아가 익주로 들어오도록 권하고, 유비는 몇 만의 군대를 이끌고 익주로 들어가서 성도에서 320리 떨어진 부성까지 와서 유장과 회담한다. 장송과 법정 그리고 [[방통]]은 이때 유장을 기습하라고 권했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다. 유장과 [[유비]]의 회담은 화기애애하였는데,[* 일단 유비와 유장 간의 회담은 그랬지만 유비와 유장의 신하들 간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당장 부성에서 유비와 장유가 나눈 대화는 양쪽 다 상당히 날이 서있는 트래쉬 토크였다. 훗날 유비는 익주를 차지한 후 장유를 숙청했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行大司馬) 영사례교위(領司隷校尉)로 천거하고, 유비는 유장을 행진서대장군(行鎭西大將軍) 영익주목(領益州牧)으로 천거했다. 함께 잔치를 벌이고 유장과 유비의 장수들은 서로 술을 마시며 우애를 다지기를 100여 일이나 했다. 유장은 유비에게 [[장로(삼국지)|장로]]를 토벌하는 것을 부탁하고 대량의 군량, 마필, 물자를 공급했으며, 백수군(白水軍)을 거느리게 하고 병사도 지원해주었다. 때문에 유비의 군대는 도합 3만 명에, 그 상태도 매우 강성해졌다. 유비는 북진하여 가맹(葭萌)현에 주둔한다. 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은덕을 후하게 베풀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거뒀다. [[팽양]]도 이 시기에 유비에게 임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