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장(삼국지) (문단 편집) === 익주공방전 === 다음 해 212년, [[손권]]이 [[조조]]에게 공격을 받자 유비는 방통의 상중하책 중 두 번째 계책을 실행한다. 유비는 유장에게 조조가 승리한다면 형주를 통해서 익주로 공격이 들어올 것이지만, [[장로(삼국지)|장로]]는 한중에 틀어박혀 웅거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위협적이지 않으니 우선 형주로 가서 조조를 막겠단 구실을 대 병사 1만과 물자를 부탁했다. 유장은 병사 4천만 빌려주고 물자도 요청한 양의 절반 정도만 지원했다.[* 나관중은 3만 명과 10만 석을 요구했는데 4천 명과 1만 석만 지원한 것으로 각색했다.] 유비가 익주를 떠나려 하자[* 물론 유비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장로를 제대로 공격할 능력도 없었던 유장이 스스로 요청해서 객장으로서 도와주러 온 것이었고 장로는 한중에 웅거한다고해도 수만 명의 병력을 일거에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군벌이었다. 게다가 한중은 천혜의 요새지, 이런 곳을 공략하기 위해선 많은 병력이 필요한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유장은 유비에게 많은 병사와 군량, 물자, 장비를 지원해주었다. 평소에도 유비에게 많은 선물을 해주었으며 유비가 익주로 입경할 때부터 온갖 편의를 봐주었다. 백수군까지 유비의 감독 하에 두었다. 그런데 유비는 약속과는 달리 장로 토벌은 제대로 실행하지도 않고 형주로 돌아간다면서 또 달라는 것만 많으니 유장으로선 삥만 뜯긴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돌아가는 경비를 어느 정도 지원해주었음은 유장이 아직은 유비를 신뢰하였거나 스스로 관계를 파탄내려 하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프로파간다]]로 이용한다. 위서에 따르면 유비가 진중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익주를 위해 강적을 정벌하며 군대는 괴로워하고 병들어 편안히 머물지 못했는데, 지금 금고의 재물을 쌓아두고 상을 줌에 인색하며 사대부가 출병해 죽을 힘을 다해 싸우길 바라니 (거사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라 노하여 일갈하며 개전의 명분으로 삼았다고 한다.] [[장송]]이 당황하여 유비에게 밀서를 보냈다. 헌데 장송의 형 장숙(張肅)이 두려워한 나머지 음모를 유장에게 폭로하여 장송은 [[참수형|참수]]되었다. 이 때문에 유장은 유비를 의심하고, 관문을 걸어잠그도록 지시했다. 유비는 분노하여 유장의 백수군 책임자 [[양회(후한)|양회]]를 꾸짖어 목을 베고 [[황충]], [[탁응]]에게 명을 내려 개전하였다. 부하인 정탁은 [[청야전술]]을 구사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유장은 "나는 적에 맞서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백성을 움직여 적을 피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하여 그 의견을 기각하였다. 유비가 부성을 점거하자 유장이 [[유괴(삼국지)|유괴]][* 혹은 유귀 劉貴], [[냉포]], [[장임]], [[등현#s-1]]을 보냈지만 모두 격파당했다. 면죽까지 밀려나자 [[이엄]]을 보내서 유비를 가로막도록 했지만 이엄은 부하들을 데리고 유비에게 항복해버린다.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불러들이고 백제(百帝)성, 강주(江州), 강양(江陽)이 모두 유비의 손에 떨어졌다. 유장의 아들 [[유순(삼국지)#s-1|유순]]이 낙성을 지켜서 겨우 1년간 시간을 끌고 [[방통]]을 사살하였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213년 낙성에서 싸우던 [[장임]]이 패배하고 유비군에게 붙잡힌다. 장임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하며 참수되었다. 214년 결국 유순이 지키던 낙성도 함락당하고 성도가 완전히 포위되었다. 성도에는 정예병 3만과 1년간 버틸 수 있는 식량, 물자가 있었지만 유장은 이미 항전 의사를 잃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유비군에 요지들을 속속 빼앗기며 위기에 몰린 시점에서도 온전한 정예군과 군수물자를 성도에 방치하고 관리와 백성들이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 충심을 확인시켜 주었음에도 유장이 이 병력을 야전에 쓸 생각 없이 그저 성도에 머물게 두었다는 점이다. 애시당초 싸우기 위해 익주 각지의 군대를 끌어모았어도 이엄처럼 그냥 항복해서 유비군의 세만 불려준 경우도 있었고 유장이 '우리 부자가 20여 년간 덕을 익주에 베풀지 못했다'고 말했던 점을 감안하면 유장은 익주의 인심이나 자군에 대한 장악력을 스스로 믿지 못하고 본거지인 성도에서 병력을 빼는 것은 불안하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고 오랜 농성이나 청야전술을 시행하면 덕망이 없는 자기가 어찌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정예군 3만은 유장이 익주 병력과 인심을 통제할 수 없어서 후방에 놔두었거나 급조한 병력일 공산도 크고, 실제로 이후 유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익주의 인심을 완전히 장악한다.] 유비는 [[간옹]]을 보내서 유장을 설득했고 유장은 "(우리) 부자가 20여 년 동안 이 주에 있으면서 은덕을 백성들에게 베푼 적이 없다. 백성들이 공격하며 싸우길 3년(百姓攻戰三年),[* 자치통감의 현대 [[백화문]] 번역인 자치통감전역(資治通鑑全譯)에는 백성들이 악전고투(매우 어려운 조건을 무릅쓰고 힘을 다하여 고생스럽게 싸움)한지 3년(百姓苦戰三年)이라고 적혀있다. '苦戰'이 중국어로 악전고투를 뜻한다. 단순 원문 번역에는 공격하여 싸운 지 3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좀 의역된 케이스다.] 살점이 초야를 기름지게 함은(肌膏草野者), 이 유장 때문인데 어찌 마음을 편히 할 수 있겠는가!"(자치통감, 후한서, 정사 삼국지)라고 한탄하며 유비에게 항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