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찬(전조) (문단 편집) === 근준의 난 === 318년 주색에 곯아있던 열종 소무제 유총이 붕어하자 황제가 된 유찬은 주색에 빠져 아버지가 남긴 부인들과 놀아나기 시작했다. 그해 9월 근준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임명하고 국정을 맡겼는데 근준은 신제 유찬의 조서를 멋대로 꾸며 사촌동생 근명을 거기장군, 근강을 위장군에 임명하여 금군을 장악했다. 이후 근준은 순식간에 반정을 일으켜 궁궐을 급습한 후 유찬을 시해했다. 근준은 유찬의 외아들이자 태자였던 유원공을 비롯해서 수도 평양에 있었던 태조 광문제 [[유연(전조)|유연]], 열종 소무제 유총의 자손을 비롯한 모든 유씨 황족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 없애고, 유연의 능묘인 영광릉과 유총의 능묘인 선광릉을 도굴해 부장품과 보물들을 손에 넣은 다음 죽은 그들의 관을 꺼내 [[부관참시]]하고 불태워버렸다. 근준은 선제 유총 시절부터 박대를 당하지 않고 외척의 지위에 올랐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근준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충 짐작할 수는 있다. 《[[진서]]》 <이구전>에 의하면 황제 유찬을 시해한 근준은 [[옥새]]를 얻어[* 역사상 유명한 보물인 [[전국옥새]]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전국옥새는 나중에 [[염위]]가 멸망할 때 동진에 보냈기 때문이다.] [[동진]]의 도독하남삼군군사였던 이구에게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 "유연은 도각(屠各)[* 북방 오랑캐의 일종]의 작은 우두머리이며 [[팔왕의 난|진나라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틈타 유주와 병주에서 난을 일으켜 천명을 멋대로 들먹이고 [[사마치|황]][[사마업|제]]를 유폐하여 [[오랑캐]]의 조정에서 시해하는 데 이르렀소. 항상 군사를 이끌고 재궁을 도울 것이니 이로 인해 이를 들어달라고 청하오." 이구는 이 사실을 동진의 중종 원황제 [[원제(동진)|사마예]]에게 알렸고 사마예는 이 틈을 타서 태상 한윤(韓胤) 등을 보내 소무제 유총에 의해 피살된 회제 [[사마치]]와 민제 [[사마업]]의 영구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근준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은 [[서진]]을 멸망으로 몰고 간 [[흉노]]에 대한 증오심이 일찍부터 있었고[* 《진서》에서도 항상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고 나와 있다.] 기회를 보아 자신이 실권을 차지한 후, 유씨 황실를 도륙내고 다시 진나라를 부흥시킬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근준은 겨우 평양 일대만 다스리고 있었고, 나머지는 장안에 있던 유요와 양국에 있던 [[석륵]]이 지배하고 있었다. 유요와 석륵은 근준을 토벌한다며 군대를 일으켰고 근준의 근대는 먼저 석륵의 군대와 양릉에서 싸웠다. 근준이 선제 공격을 했지만 석륵은 [[짬밥]]으로 이를 모두 격퇴하고 도리어 근준을 평양까지 몰아부쳤다. 유요도 평양 부근의 적벽까지 왔는데 이때 태부 호연안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유요에게 투항했다. 한나라의 신하들은 유요에게 황제가 되도록 권했고, 유요는 이를 받아들여 즉위한 후 대사령을 내렸다. 하지만 여기서 근준의 일족은 제외되었는데 근씨를 모두 없애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근준은 [[버틸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석륵에게 화친을 청했지만 거절당했고 12월 근명과 근강 등은 근준을 죽이고 유요에게 항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