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표 (문단 편집) === 형주 평정 === 그는 [[당고의 금]] 사건[* 여담으로 이때 벌써 성년의 나이로 20대였다. 유비가 황건적이랑 싸울때랑 비슷한 나이였으니 말이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 사실 죽을때도 70살 근처에 죽었으니 거의 자연사급으로 오래 산 것이다. 조조보다 오래 살았다.]으로 인해 숨어 살고 있었지만, [[황건적의 난]]으로 당고가 해제되자 [[하진]] 밑에서 대장군연을 지냈으며, 북군중후(北軍中候)[* 북군중후는 당시 중앙군 조직 중의 하나인 북군(北軍)의 수장이다. 후한 말 중앙군은 황실의 근위군인 위랑(衛郞), 궁성을 경비하는 남군(南軍), 수도 외곽을 방어하는 북군(北軍), 도성 내의 치안과 순찰을 담당하는 위수군(衛戍軍)의 4개 조직으로 구성되었다.]를 지내고 있다가, [[동탁]]이 권력을 잡고 있던 190년에 형주자사로 임명된다. 당시 형주의 상태는 [[막장]]이었는데, 실력자였던 [[원술]]이 손견을 사주해 남양태수 [[장자(삼국지)|장자]]를 죽이고 남양을 점거한 후 노양에 주둔하면서 손견을 보내 동탁과 싸우고 있었다. 유표는 원술의 견제를 받아 자사의 치소가 있는 무릉까지는 내려가지도 못한 채 단기필마로 양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또한, 유표의 전임 형주자사였던 [[왕예]]가 [[손견]]에게 살해당해 권력의 공백이 생겨 수많은 호족들이 제각기 무리를 일으켜 난립하고 있었다. 이 무리들은 흔히 '도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을 지칭하는 원문은 종적(宗賊)이고 이는 향촌의 씨족을 중심으로 한 무장집단을 뜻하는 것이라 일반적인 도적떼와는 다소 성질이 다르다. 왕예의 죽음으로 인한 통치권력 부재에, 동탁의 집권으로 인한 국가 정통성 붕괴 등으로 치안이 불안정해지자 각 고을의 유력 가문들이 제각기 군대를 조직한 것인데,(이들 중 군사력을 바탕으로 인근에서 왕노릇하려는 소영웅이나 떼강도 같은 무법자들도 일부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국가 권력을 믿지 못하면서 생긴 자경대 개념에 가깝다. 결국 국가 입장에서 봤을 때 똑같은 도적이긴 마찬가지지만, 당시 중앙을 장악하고 있던 동탁은 빼도박도 못할 역적 취급을 받았으며 헌제는 동탁이 마음대로 세운 괴뢰 황제로 여겨졌고 유표는 그런 중앙에서 임명된 형주자사였음을 생각하자. 혈혈단신으로 형주에 부임해 지지기반이랄 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유표는 이토록 중앙을 따르지 않는 호족들이 원술에게 협력할 것을 매우 두려워했으며 원술을 남양태수로 인정하도록 조정에 상주하고,[* 후한서 원술열전.] [[18로 제후|산동 반군(=반동탁 연합군)]]에 합세[* 위서 유표전]하는 등 초반에는 원술에게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유표는 [[채모]], [[괴월]], [[괴량]] 등의 유력한 호족들과 긴밀하게 연대했으며 특히 채모와는 인척관계를 맺어 친분을 갖는다.[* 채모의 누이가 유표의 후처 [[채부인]]이다. 당시 채씨 가문은 형주 최고의 명문 세도가였으며, [[제갈량]] 역시 [[황부인|채모의 외조카]]와 결혼하여 이 집안과 인척관계를 맺었다. 일설에는 [[황승언]]이 제갈량에게 "내 딸이 용모는 별로지만 머리가 좋아서 자네와 짝이 될 만하다"고 해서 결혼에 동의했다고 하나, 진상은 모를 일이다. 권력 관계를 고려하면 제갈량이 황씨를 아내로 고른 게 아니라 황승언이 제갈량을 사위로 고른 것에 가까울 것이다. (제갈량은 형주 출신도 아니고 서주 출생의 이주민에 불과했으나 황씨는 형주 최고 세도가의 외조카이자 형주자사 유표의 처조카이다) 당대 사람들은 제갈량의 결혼을 두고 황승언의 못난 딸을 얻었다며 비웃었다고 하니 아마도 처가 덕을 보려고 정략결혼을 한 것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이에 유표는 [[양양(중국 도시)|양양]]에 치소를 설치하고,[* 원래 형주자사의 치소는 무릉군이다. 채씨와 괴씨가 양양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괴월의 협력에 힘입어 55명에 이르는 종수들을 초대한 뒤 모두 끔살시켰으며, 채모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두목 없이 혼란에 빠진 무리들을 남김없이 소탕한다. 이렇게 반대세력들을 일거에 정리하며 본보기를 보이자, 기존 형주 각 군현의 태수,현령들은 대부분이 유표를 두려워하여 감히 거역치 못했으며[* 태수는 자사의 지시를 받는 것이 원칙이나 관위상으로는 동급이라 상호간 견제가 심했다.] 유표는 형주 전역에서의 통치력을 확고히 하여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유표는 채모의 말을 거절하기 힘든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유표는 [[원소(삼국지)|원소]]와 연합하며 원술을 견제했고, 이에 원술은 손견을 보내 유표를 응징한다. 유표는 [[황조]]를 보내 번(樊)과 등(鄧)현 사이에서 맞서 싸우게 했으나,[* 남양과 양양의 경계로 한수 이북에서 요격한 것이다.] 황조는 패하고 손견이 한수를 건너 양양을 포위하는 등 전황은 매우 불리했다. 유표는 양양을 수비하는 한편, 황조를 재차 성 밖으로 보내 포위를 뚫고 인근의 군현에서 군사를 모아 합류하게 하는 기각지세를 취한다. 손견은 황조를 추격해 격파했으나 산 속에 숨은 황조를 쫓는 과정에서 단기로 숲을 거닐다가 매복해있던 황조군의 [[저격수]]가 쏜 화살에 맞아 죽는다. 손견의 죽음에는 이설이 있는데, 형주의 문관으로서 비범한 기억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한 왕찬의 영웅기에서는 유표가 부장 [[여공]]을 보내 산을 타고 손견을 공격하게 하자 손견이 경기병을 이끌고 역공을 가하던 도중 돌에 맞아 머리가 터져 죽었다고 한다. 이렇듯 손견의 최후에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포위된 유표가 밖으로 별동대를 보내 기각지세를 시도했고, 손견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너무 서두르다가 변을 당했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하는 듯 하다.[* 일찍이 여러 전승과 군담극에서부터 연의에 이르기까지, 또 비교적 최근의 창작물에서도 주로 후자에 가깝게 묘사되는 경향이 보이는데 유표군에서 계교를 써 손견을 막다른 곳으로 꾀어낸 후 낙석계로 손견을 죽이는 묘사가 일반적. 이렇게 손견을 유인하고 낙석으로 손견이란 영걸의 목숨까지 거두는 데에까지 계책을 짠 지모의 소유자가 [[괴량]]으로 그려지는 점 또한 빠지지 않는 편이다.] 손견이 죽고 남은 무리들이 혼란에 빠지자 역공에 나서 이들을 깨끗하게 소탕한 유표는 형주의 패권을 확고히 하였으며 천하의 시국을 관망하며 한번에 정세를 뒤집을 적기를 노리듯 남몰래 야심을 키운다. 유표는 일개 형주목에 불과했지만, 천자의 고유한 의식인 교천제를 지낸다든가 크고 작은 예법과 치장 등에서도 천자만의 권리였어야 할 것들을 범하였다. 조조가 헌제를 받들어 조정과 종묘사직의 기틀을 다시 복원하였음에도 이미 동탁에 의해 한나라가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여겨지고 있었던 만큼, 한제국의 붕괴와 군웅할거의 시대에서도 평온함을 지키고 있던 형주의 주인으로 할거하며 '유(劉)'라는 성씨와 청류파의 명망과 유학의 권위에 의지하여 손 한번 대지 않고 코 풀듯 자연스레 왕후의 자리에 오르고 나아가 천자로 추대되길 기대하는 야망이 유표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덕과 도리로써 마치 아래로 내려다보고 타이르듯 외교전을 펼쳐 천하의 대국을 뒤흔들었던 흔적 및 방침이라든가, 장수와 유비를 인근에 주둔시키고 지원함으로써 직접 손을 더럽히고 피를 흘리는 바 없이 영역을 깨끗하고 안전하게 유지해온 노회한 면모에서 유표가 야심과 역량이 만만치 않은 걸물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같은 해 6월에 [[이각]]과 [[곽사]]가 정권을 장악하자, 유표는 겨울에 중앙으로 조공을 보냈고, 이각 등은 유표를 외원으로 삼기 위해 진남장군(鎮南將軍), 형주목(荊州牧)으로 삼고, 성무후(成武侯)으로 봉했으며, 절(節)을 수여하였다. 형주목 수여 이전에 유표는 안남장군(安南將軍), 형주자사로 임명되어 있는 상태로, 이는 후한 때 일반적으로 보이는 장군(을 포함한 여러 임시 무관직)과 지방 행정관의 결합 형태다. 이각 등이 주체가 되어서 내린 권한은 이 직에서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3년, [[조조]]와 원술이 싸울 때는 원술의 후방을 공격해 양도를 끊는 등. 원소와 같이 조조를 도와 원술을 견제했고, 원술은 참패하여 남양에서의 세력을 완전히 잃고 양주로 달아난다. 194년에 익주목 [[유언(삼국지)|유언]]이 죽고 그 아들인 [[유장(삼국지)|유장]]이 집권하면서 익주의 호족 [[감녕]]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별가 유합을 보내 지원한다. 감녕은 패하여 유표에게로 망명해왔으나, 유표는 감녕을 남양군에 머무르게 할 뿐 별로 신임하지 않는다.[* 감녕 또한 유표가 군사일을 모르는 서생에 불과해 같이 일을 도모하기 어렵다 여겼다고 한다.] 196년, [[장제(후한 군벌)|장제]]는 식량이 부족해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남양을 침략했다가 활에 맞아 죽는다. 이때 형주의 관리들이 모두 축하했으나 유표는 "장제가 곤궁하여 손님으로 왔는데 주인(=유표 자신)이 무례하여 교전에 이르렀다가 죽었으니, 자신이 빈주의 예를 지키지 못한 것이므로 조문을 받을지언정 축하를 받을 수 없다"며 매우 안타깝게 여기는 듯한 태도~~쇼맨쉽~~를 보여 장제 잔당들의 환심을 샀고, 사자를 보내 장제 뒤를 이은 조카 [[장수(삼국지)|장수]]를 받아들여 남양에 주둔하게 해 번병으로 삼는다. 같은 해에 이각,곽사 등에게 벗어나 낙양으로 달아난 [[헌제]] 유협은 태복 조기를 형주로 보내 조세를 보낼 것을 독촉했고, 유표는 조기가 도착하자 즉시 군사를 파견하고 각종 물자를 보내며 황궁의 수리를 돕는다.[* 후한서 조기열전] 다만 이 기록은 다소 애매한 것이 헌제기에 따르면 각 주군에서 강병을 끼고 있었으나 물자를 보내지 않았다고 서술되어 있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기록된 군벌은 [[장양]] 정도를 제외하면 없으며, 유표 본인의 전기에서도 같은 해에 장제의 무리를 흡수한 것만 비중있게 기록되고 있을 뿐, 조정에 협력한 것은 전혀 언급이 없으며, 여타 기전에서도 유표가 후한 조정과 연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서술만 넘쳐나기 때문이다. 조기의 열전에서도 유표는 헌제를 맞아들여 봉영하려 한 것이 아니라 물자를 보내는 것에 그치고 있는데, 장제의 무리를 흡수한 것이나, [[누규]]가 남양에 주둔하며 삼보의 유민들을 형주로 보냈다는 점, 실제로 상당히 많은 네임드 명사들이 삼보의 난 이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던 점을 봤을때 아마 유표는 조정을 장악하고 천자를 이용해 패권에 도전할만한 배짱은 없었고, 다만 물자를 보내 중앙에 생색을 내는 한편 삼보의 난으로 대거 발생한 유민들을 흡수해 세를 불리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정에서는 유표의 생색마저 아쉬웠으므로 어사중승 [[종요]]를 파견해 유표의 격을 삼공과 같게 해 독자적인 부 개설권을 가지고 관리를 천거하며 임명할 권한을 내렸으며, 교주, 양주, 익주의 감찰권을 더했다. 사실상 남중국의 최고 권력자로 임명한 샘인데, 이에 더하여 북, 피리, 큰 수레를 내리고 황제의 '''백부'''라는 극존칭을 주었다.[* 유진남비.] 유표를 황실 최고의 웃어른으로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헌제를 봉영하고 조정을 장악해 허도로 천도한 [[조조]]는 불과 4개월도 지나지 않은 197년 1월에 남양을 수비하던 장수를 공격한다.[* 급성장하는 유표의 견제와 배후의 위협 제거 차원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 유표는 조조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고, 남양은 중원의 유민들을 형주로 유입시키는 관문에 해당하는 데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허도를 직접 타격할 위험성도 매우 높았다.] 장수는 일단 조조에게 투항했으나 진심으로 조조를 따른 것은 아니었던 데다, 조조가 장제의 미망인을 취한 일로 조조에게 원한을 가졌기에 조조를 습격해 패퇴시켰으나,[* [[전위(삼국지)|전위]]와 [[조앙]]이 죽는 싸움이다.] 조조가 반격에 나서자 양현[* 당시 남양군의 남쪽에 있다.]으로 달아났고 유표와의 결속을 더욱 굳게 했다. 이후 조조는 황제를 자칭한 원술을 격파하는데, 이 사이 유표는 장수를 지원하며 여러차례에 걸쳐 남양 일대를 공격했고, 조조는 [[조홍]]을 보내 막게 하지만 조홍이 패하자 자신이 직접 남하하여 197년 겨울부터 198년 여름에 걸쳐 유표와 여러차례 싸운다. 조조는 198년 5월에 장수를 양현에서 재차 포위하였으나 유표가 원군을 보내 조조의 후방을 차단하도록 하자 퇴각한다. 이때 장수의 모사 [[가후]]는 조조군이 후퇴할 때 섣불리 뒤쫓으면 (조조가 대비를 했을 것이기에) 질 것이라 예견했다. 과연 장수와 유표가 패해 돌아오자 "이때야말로 공격할 때다"라고 했고, 그것도 들어맞았다. 조조군이 너무 급하게 돌아가느라 다시 방어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 한편 이 무렵 조조는 유표를 견제하기 위해 유표에게 소외되고 있던 장사태수 [[장선(장사태수)|장선]]을 부추겼고, 장선은 영릉, 계양군을 들어 유표에게 반기를 들었다. 남북으로 전선이 양면되어 있던 유표는 오랬동안 장선을 토벌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했지만 조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마침 장선도 병으로 죽었기에 장선의 세력을 물려받은 아들 [[장역]]을 간단히 제압했다. [[유언(삼국지)|유언]]이 188년 주목 설치를 건의한 이래, 멸망으로의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던 한나라 중앙정부는 이를 데 없이 강력한 권한을 가진 익주목 유언과 형주목 유표로 더욱 곤란한 상황이 된다. '형주자사'였던 유표에게 '형주목' 등의 확장된 권한을 지닌 관직을 내린 것은 이각 등이 유표를 자신의 편으로 삼고자 함이지 이각과 떨어진 한나라 정부 입장에선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 어쨌거나 덕분에 유표는 유언을 훨씬 능가하는 다음과 같은 매우 파격적인 한나라의 관직을 받게 된다. 사지절 정남장군 벽소개부 의동삼사 독교양이주 형주목(使持節 鎮南裝軍 開府辟召 儀同三公 督交揚二州 荊州牧) 관질 2000석 이하의 관리를 처벌할 수 있는 군사법권을 가지고, 정남장군 부(府)를 개설해 필요한 속관을 임명할 수 있고, 관직의 격은 삼공과 같으며, 교주와 양주의 군사 지휘권을 가진 채 형주의 군령/군사법권/군정/민정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관직이다. 한나라가 당시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이런 관직을 내릴 수가 없다. 물론 양주와 교주는 각각 [[원술]] 혹은 손씨일가와 [[사섭]]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명목상 그렇다는 것이지만 하여간 어마어마한 권리임에는 틀림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