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표 (문단 편집) === 대외에서의 공격 === 이렇게 야심만만한 유표가 힘을 키우는 것을 보고 중앙조정은 점차 유표를 견제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양주를 장악한 손책과 익주의 유장을 이용해 유표를 견제하려 한 시도를 한 것이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은 사공 조조, 위장군 [[동승(삼국지)|동승]], 익주목 유장과 힘을 합쳐 원술과 유표를 토벌하라는 조칙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중앙의 조조와 동승이 실제로 유표를 치는 행동에 나서지 않은 것은 명확하고, 유장 또한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손책은 확실히 행동에 나서는데 이는 원술이 남긴 유산이 계기가 된다. 199년 하순, 결국 재정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망한 원술이 병들어 죽자 그 잔당들은 여강태수 [[유훈(삼국지)|유훈]]에게 모여들었는데, 그 무리가 워낙 많았으므로 물자가 부족해진 유훈은 [[손책]]과 연합해 인접한 예장군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손책은 원술의 잔당들을 탐내 유훈과 거짓으로 동맹을 맺고 배후를 급습할 생각이었고, 유훈이 외부로 나가자 직접 나서 유훈의 근거지인 환성을 점거하는 한편 사촌형인 [[손분#s-1]], [[손보#s-1]]를 보내 되돌아오는 유훈을 격파한다. 유훈은 유표에게 위급함을 고하며 원군을 청하자 이에 유표가 개입하여 강하태수 [[황조#s-3]]의 장남 [[황역#s-1]]을 파견하지만 유훈은 황역이 도착하기 전에 패하여 조조에게로 달아났고, 손책이 역공에 나서 강하군까지 진격하자 황조는 2~3만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며 참패하고, 유표에게서 원군으로 파견된 유표의 조카 [[유호]]까지 죽는다.[* 손책이 조정에 보낸 상주문에 따른 것인데, 일단 유표 측의 참패인 것은 사실이지만 전사자의 수는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손책은 이를 들어 '폭위를 떨치던 유표의 한쪽 팔이 꺾였다.' 고 표현했는데 내용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고, 유표 진영의 사정은 기록이 없는 관계로 교차검증이 불가능하지만, 동쪽 전선의 책임자였던 황조는 손책 사후 대혼란에 빠진 손씨 정권에게 전혀 공세를 가하지 못했고, 한참 지난 206년에야 고작 한 차례 공세를 시도하기 때문에 정황상 동부 전선이 거의 재기불능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물론 강하군이 아니라 형주 남부의 장사군을 통해 양주 예장군을 거치며 손가를 견제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하고 실제로 [[유반]]의 사례를 봤을때 유표가 손가 측에 공세를 가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기록이 워낙 적어서 애매한데다 그마저도 결국 [[태사자]]에게 모두 막혔다.] 이는 199년 12월의 일인데, 같은 시기에 북방 전선의 핵심인물이었던 [[장수(삼국지)|장수]]는 조조에게 항복한다. 두 전선이 거의 동시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게다가 후계자 문제도 심각했다. 유표는 본디 장남 [[유기(삼국지)|유기]]를 총애했으나, 차남 [[유종(삼국지)|유종]]은 채모의 조카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것을 계기로 채씨 가문과 공고히 결탁했고, 채부인과 채모가 안팎으로 유기를 음해하며 유종을 열심히 띄웠기에 유기는 점차 쩌리로 밀려났으며 종국에는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중앙에서 자발적으로 퇴진하게 된다. 물론 유표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손책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강성한 세력이었고, 남중국의 최강자였으나, 이후 유표가 보이는 한심할 정도의 우유부단함과 채모 등 양양 파벌(채씨)의 독주는, 남양([[장수(삼국지)|장수]])과 강하([[황조#s-3]]) 파벌이 일시에 증발(!)하면서 세력 내부의 권력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