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표 (문단 편집) === 말년 === 200년, 원소가 조조를 치기 위해 남하한다. 유표와 우호관계에 있던 원소는 조조의 배후를 치며 조력해줄 것을 요구했고, 유표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정작 원소와 조조의 대치가 길어지는 상황에서도 장강(長江)과 한수(漢水) 사이를 보전하여 움직이지 않고 관망만 한다. 이는 [[장선(장사태수)|장선]]의 반란도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이며 당시 장사태수 장선(張羨)이 유표를 배반하였는데, 유표는 포위한지 몇 년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장선이 죽자, 그 아들 장역을 세웠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치통감에서는 200년에 이 반란이 진압되었다고 나오는데 관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진압한 것으로 나온다. 어쨌거나 조조와 원소의 대결 당시 유표는 결국 장역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남으로 영릉, 계양, 북으로 한천을 거두어 땅이 수천리에 이르고 병력이 10여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조조와 원소의 대결이 있었고 원소가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그저 관망만한 것이다. 남/북의 전선에서 모두 승리해 드넓은 형주 전역을 완전히 제패한 유표는 대세력으로 부상했으며, 비록 원술처럼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권한인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의 의장을 쓰는 등 야심을 드러낸다. 당연히 중앙에서도 결코 곱게 보진 않았기에 이 무렵에는 사실상 원술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헌제는 유표를 토벌하고자 했으나, 유표를 칠 능력도 없으면서 역적이라 선포해 봤자 비웃음거리만 될 것이니 잠시 덮어두라는 공융의 조언에 따라 일단 유표의 처분을 유보하기로 한다.[* 후한서 공융열전.][* 마침 이때 [[공손찬]]을 멸망시키고 하북 4주를 완전 장악한 [[원소(삼국지)|원소]]가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상황이었기에 조조는 나설 수 없었다. 물론 헌제나 공융은 중앙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조조 역시 원소, 유표와 같은 부류로 보았지만 말이다.] [[환계]]전에 따르면 장사와 옆의 세 군을 인솔하여 유표에게 항거하고, 사자를 보내 조조를 만났는데 조조는 매우 기뻐했다. 마침 이때, 원소와 조조가 전투를 계속했으므로 조조의 군대는 남쪽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표는 급히 장선을 공격하였고, 장선은 병들어 죽었다. 성은 함락되었으며, 환계는 스스로 몸을 숨겼다. 조조는 형주를 평정한 후, 환계가 장선을 위해 계책을 세웠다는 것을 듣고 그를 평가하고는 불러서 승상연주부로 임명하고, 조군태수로 승진시켰다. 어쨌거나 장선을 평정한 후 병력과 땅이 충분한 상황에서 [[한숭]], [[유선(후한)|유선]] 등은 조조에게 항복하자고 하고 괴월도 이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유표는 이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단지 [[한숭]]을 허도에 사신으로 보내 정탐케 하였는데 [[한숭]]이 벼슬을 잔뜩 받아 되돌아오곤 조조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유표의 아들들을 조조에게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채부인]]은 명망있는 [[한숭]]을 죽이면 여론이 흩어질 것이라며 말렸으므로 결국 유표는 [[한숭]]을 옥에 가두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진수(역사가)|진수]]는 이를 가리켜 유표가 마음에 의심과 꺼림이 많아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유표가 [[한숭]]을 허도에 보내려고 하자, [[한숭]]은 이렇게 될 것을 짐작하고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유표가 억지로 보냈고, 결국 [[한숭]]의 예상대로 그는 헌제에게 벼슬을 받아 유표가 아닌 한 조정을 대변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한 조정의 실권자인 조조를 대변하는 발언을 하니 유표가 꼭지돌아 죽이려고 한 것이다. [[한숭]] 입장에선 경고를 무시한 주제에 역정을 내고 있으니 결국 배째라고 "주군이 먼저 절 버리지 않았습니까"라고 따지게 된다. [[한숭]]의 발언이 똥오줌 못 가리는 발언일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하게 만든 게 유표 본인이란 걸 생각하면 진수의 평이 마냥 틀리다고 깔 수도 없다.] 이후 원소는 [[유비]]를 여남으로 보내 유표의 개입을 독촉하지만 유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 자체는 말이 되는 게 객관적으로는 원소의 승률이 높았으므로 굳이 조조를 때려서 원소의 승률을 올려줄 필요가 없었다. 유표에게 가장 좋은 결과는 둘의 전쟁이 우열을 확실하게 가리지 못하고 힘만 빼는 것일 테니까. 어쨌거나 이 시점에서 유표의 참전은 변수가 많았다. 유표가 이길 것인지도 의문, 이긴다 하더라도 유의미하게 이득을 거둔 채로 판세 굳히기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유비가 2차 서주 점령했을 때처럼 갑자기 독립한다던가 관우가 뒤치기 맞았듯 손책에게 뒤치기 맞을 수도 있고.] 유일하게 확인되는 것은 당시 양안군을 다스리고 있던 [[이통]]을 회유했던 것인데, 물론 실패했으며, 이후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하고 유비 역시 조조에게 패하여 도주하자 유비를 받아들여 신야(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게 한다. 유표는 유비를 받아들인 뒤 그를 매우 후하게 대우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현덕은 같은 유씨 황실의 종친이니 내게는 동생과도 같다"면서 형제처럼 대접했다. 기존에 [[장수(삼국지)|장수]]가 했던 역할을 유비에게 맡기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유비에게 귀부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지며 점점 그 세가 커지자 결국 유비를 두려워하며 견제하게 된다. 관도에서 승리한 조조는 유표를 공격하고 싶어했지만 원소가 배후를 습격할 것을 두려워해 황하에서 대치할 뿐 움직이지 못한다. 이후 202년, 원소가 병사하고 막내아들 [[원상]]이 후계자가 되자 조조는 그 틈을 노리고 하북을 공격했고 원상의 반격을 받아 패했으나, 후계자로서 입지가 취약한 원상이 배후를 공략할 역량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유표 토벌에 나서 예주와 남양군의 경계인 서평군에 주둔한다.(203년 8월.) 일촉측발의 상황이었으나, 마침 후계 문제로 원상에게 도전했다가 패한 [[원담]]이 조조에게 투항하자 조조는 다시 전선을 포기하고 하북으로 향해 원상과의 대결을 벌인다. 조조가 눈앞에서 등을 보이고 퇴각하는 상황이었으나 유표는 조조를 치지 않았고, 이후로도 개입을 요구하는 원상의 독촉이 수차례 이어졌으나 유표는 끝내 조조의 배후를 치지 않고 방관했기에 조조는 배후의 걱정없이 순조롭게 하북을 평정해 나간다. 이에 대해서는 친조조파로 돌아선 채모 등 양양 호족들이 득세하면서 이들에게 휘둘렸다는 분석이 있는데, 이렇게 볼 경우 유비를 공들여 영입한 것은 이를 견제하기 위함이었겠지만 유표는 그런 유비조차도 고삐가 풀릴 것을 견제하며 간을 보다가 모든 기회를 놓친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조조는 원상을 죽이고 하북을 완전히 평정한 이듬해에 곧바로 남하하였고, 유표는 조조가 형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병으로 숨을 거둔다. 유표가 죽자 후사를 물려받은 차남 [[유종(삼국지)|유종]]은 채씨 일족 등 화친파의 여론에 따라 조조에게 항복했고, 당시 형주 내 주전파의 대표격으로 부상해 있던 유비는 유기를 옹립하여 형주자사로 내세웠다. 유종과 유기는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