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표 (문단 편집) == 평가 == [[형주]]는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가 많았으며 인재층 자체도 풍족하다고 할 수 있어 이를 바탕으로 힘을 길러 천하를 도모해 볼 만도 했다. 그러나 유표는 죽는 순간까지 적극적인 전략을 구사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지내기만 했다. 《[[후한서]]》에 따르면 20년간 [[형주]]를 다스렸지만 개인적으로 축재한 재산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제갈량]]의 언급에 따르면 "매년 [[대사면]]을 내리곤 했다."고 한다.] [[범엽]]은 유표에게 [[장자]]다운 풍모가 있었지만 단지 가만히 누워 관망하면서 천운을 거두고 천하가 삼분될 것이라 여기니 [[나무]] [[인형]]과 같은 인물이라며 별로 좋지 않게 평가했다. 《[[태평어람]]》에 따르면 유표는 남쪽 땅을 마음대로 차지했고, 자식들 또한 방자하게 날뛰는 성품이었는데 이들 부자는 하나같이 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술잔 세 개를 만들어서 큰 것을 백아(伯雅)라 하고, 다음 것을 중아(仲雅), 작은 것을 계아(季雅)라 했고 백아는 일곱 되, 중아는 여섯 되, 계아는 다섯 되들였는데, 술자리 끝자락엔 큰 바늘을 둬서 취해서 바닥에 쓰러져 뻗은 사람이 있으면 갑자기 바늘로 찌르며 취했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이는 조경후(趙敬侯)가 통에 담은 술을 사람에게 부은 것만큼이나 추악한 일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유표 삼부자의 술버릇은 매우 좋지 않았던 듯하다. [[가후]]는 유표를 만나보곤 평상시라면 능히 삼공에 오를 만한 재주를 갖췄지만, 사세를 살피는 데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니 (난세에서는) 무능한 인물로 봐야할 것이라 평가했으며, [[제갈량]]과 [[감녕]]은 유표가 유생이라 군사의 일을 잘 모른다고 평가했다. 일반적으론 야심이 없고 온화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황실에 [[조공]]을 끊고 황제와 의복, 음식을 동일하게 하고 살았으며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등 [[황제]] 흉내를 낸 것을 봤을 때 야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서의 평가도 하나같이 야심가에 가깝다. 말년 행적등을 근거로 군사적으로 무능하다는 면모로 묘사되기도 했으나 유표는 처음 형주자사로 부임할때 거의 단신, 원술의 견제로 자사의 치소가 있는 무릉에는 접근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능란한 [[차도살인|차도살인계]]로 결국 형주 전역을 평정하는 수완을 보였으며, [[이각]], [[곽사]]에게 대항하기 위해 [[마등]]과 연합했고, 원술과 맞서기 위해 [[원소(삼국지)|원소]]와 연합하는 한편, [[황조#s-3]]를 통해 강동의 손가를 견제했고, [[조조]]가 남쪽을 노릴 무렵에는 [[장수(삼국지)|장수]]를 지원하며 조조를 견제했다. 이후 장수가 조조에게로 돌아서자 이번엔 [[유비]]를 부려 다시 조조를 견제하는 '''파수견'''이 되게 하는 등, 하여간 음흉했다. 특히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에 의하면 유표는 동탁과 도대체 뭐가 다른지 모를 위인으로 후한 4대 역적을 [[동탁]], [[원소(삼국지)|원소]], [[원술]], 유표라 칭했다. 넷 다 현직 황제의 정통성을 부정한 공통점이 있는데 동탁은 황제를 소제에서 헌제로 갈아치웠고, 원술과 유표는 참칭했으며, 원소는 황제를 유우로 갈아치우려는 시도를 했다. 한 마디로 '''후한에서 황제에게 가장 불충한 4인방'''인 것이다. [[망탁조의]]로 엮이는 조조도 전횡은 부렸지만, 이 4인방과는 다르게 현직 황제의 위치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의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음으로서 이 불충자 대열에 합류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본인이 군사적으로 무능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러면서도 과감한 기용은 절대 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부하들을 견제하는 측면이 지방 군벌 수준을 넘어서 패권에 도전하는 것에 두고두고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군사력을 통한 철저한 복속 없이 모략에만 의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 범엽은 원소와 유표를 비슷한 부류로 묶었다. [[원소(삼국지)|원소]]도 자유자재로 모략을 사용하며 세력을 얻었지만 원소는 유표에겐 없는 군사적 재능이 있었고, 그래서 훨씬 노골적인 내부 숙청을 거듭하면서 철권을 휘둘렀다. 유표가 나무 인형 같다는 평가 역시 원소는 자기 잘난 맛에 오만하고 비정하기가 짝이 없고, 유표는 원소만큼 막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저 앉아서 관망할 뿐이니 한심하긴 마찬가지라는 의미에 가깝다.] 유표가 황제 흉내를 내던 것 역시 자신의 부족한 군사적 성과와 내부의 불만을 권위라는 후광으로 억누르는 측면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부족한 군재를 정치력과 권모술수로 메꿔나간 인물이었다. 원소가 병사한 이후에도 후계자인 [[원상]]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는데, 서신을 보내 원상과 [[원담]]의 화해를 촉구했으며 조조에게 항복하려는 원담을 꾸짖기도 한다. 하지만 원상이 조조와 원담에게 협공당해 망하게 생겼는데도 끝끝내 지원은 안 했다.[* 연의에서는 이를 '''[[유비]]'''의 계략으로 바꿨다. 유비가 원씨 형제가 얼마 못 버틸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괜히 편들어서 조조의 분노를 사느니 도와주지 말자고 유표에게 간언했다는 것. 유표가 "그렇다고 어떻게 단칼에 잘라서 거절하겠나?"라고 묻자 유비는 "화해를 주선하는 글을 써서 보내면 됩니다."라고 했고 유표가 이에 응했다.] 결과적으로 조조는 별다른 후방의 위협 없이 원씨의 세력을 완전히 흡수하게 됐고 유표만이 고립되어 홀로 남게 된다. 유비는 조조가 원상을 쫓아 오환을 공격했을 때 조조의 후방을 찔러 정복사업을 도모할 것을 유표에게 건의하기도 했지만, 끝내 유표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고, "유표는 유비의 성공을 질투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장은 조조 진영 내 오환 원정 긍정론의 주요 근거 중 하나로 내세워질 정도로 유표의 의심병은 심각했다. 사실 조조의 오환 원정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엄청난 무리수를 안고 시작한 작전이었기에 그동안 비교적 평온하게 내실을 다질 수 있었던 형주의 병력을 동원하여 북벌을 수행했다면 삼국지의 스토리는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형주의 전력을 온존하고 있는 대병 + '''유비 · 관우 · 장비 · 조운'''을 들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훗날 주유는 손권에게 제안하기를, 유비를 붙잡아 앉혀놓고 자신에게 관우와 장비를 부리게 해 준다면 서촉 정벌이 순탄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주유 본인의 군사적 재능에 대한 자신감에 근거한 말이겠으나, 그만큼 관우, 장비 하면 천하의 맹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 그런데 형주의 병사들에 관우 장비를 다 쓸 수 있었던 유표는 조조의 배후를 노리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관우 본인이 훗날 형주의 일부만 지배하고 있는 상태에서 조조와 전쟁을 벌일 정도였다. 유비는 조조 본인이 인정하는 맞수였고 장비 또한 삼국시대륻 대표하는 명장 중 1명이였으니 최강의 용병부대로 쓸 수 있음에도 기회를 놓친 것. 물론 유비 본인이 (원술 밑에 있던 손견/손책 부자와 마찬가지로) 절대 남의 신하로 만족 못할 야심가긴 하지만, 뛰어난 인재를 데리고도 너무 활용을 못한 건 부인할 수 없다.] 조조의 세력권을 일시 함락은 못 시키더라도 땅을 빼앗고 형주를 안전거리에 둘 수도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표는 유비의 제안을 거절했고 조조가 그 동안 원씨 일가를 쓸어버리고 돌아오자 대세가 다 결정되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했다. 다만 조조가 하북의 원씨 일족과 싸우는 동안 유표가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닌데, 교주목 장진을 연이어 공격했고,[* 오서 설종전.] 싸움에 질린 장진의 부장들이 장진을 살해하자 [[뇌공#s-1]]을 교주자사로 파견했으며, [[오거(후한)|오거]]를 창오태수로 보내는 등 교주까지 세력을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조조와 패권을 겨루기보다는 그냥 무난하고 쉬운 상대를 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세상 점차 고립되어가는 상황에서 패권 장악은 완전히 포기하고 지역할거 의지만 확고히 하는 악수에 가깝다. 이에 조조는 교지태수 [[사섭]]을 수남중랑장으로 삼고, 교주 전역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며 유표와 대립하게 하지만, 본격적인 결과가 나오기에 앞서 이미 유표는 죽어버렸고, 이후 뇌공과 오거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서 이 틈을 탄 손권이 오거를 죽이고 교주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이때는 이미 유표가 죽고 세력이 와해된 이후의 상황이니 유기를 옹립하고 있던 유비가 뭔가 단물을 더 빨아먹을 기회를 놓쳤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두기 어렵겠지만... 유표의 일생이 사실 그렇게까지 저평가 될만한 것은 아니다. 혈혈단신으로 형주에 부임해 와서 형주라는 넓은 영토를 자기 것으로 오롯이 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후계를 넘겼다는 것은 사실 대단한 위업이다.[* 위, 촉, 오를 제외하고 세력의 계승에 성공한 사례는 [[원소(삼국지)|원소]], [[유언(삼국지)|유언]]과 함께 꼽힐 만하다. [[마등]] - [[마초]]의 경우 게임과는 다르게 [[한수(삼국지)|한수]]를 위시한 [[서량]]의 [[군벌]]들을 수하로 거느린 상태가 아니었기에 실질적인 세력은 이 셋과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시대상이 시대상이라 칭제는 못했지만 거의 칭제에 가까운 행세를 했기에 [[오대십국]]이나 [[오호십육국시대]]로 따지면 나름대로 하나의 지방 왕조를 개창한 것 정도까지는 된다. 형주에서는 거의 패왕 수준이었던 것. 극에 달한 정치력으로 형주의 무수한 호족들을 제압하고 회유하여 권력을 잡았고 남중국에서 최대 세력을 구축했으니까.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이 항목에 잘 서술되어 있으며 이 시기 수많은 지방 행정관들은 [[비명횡사]]하거나 보다 더 큰 세력에 복속되는 게 보통이었다. 유표의 단점이라면 그의 지나친 학자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유표가 그의 전문분야인 모략과 정치술수에 지나친 집착을 보인 것은 확실하고 명쾌한 진리에 집착하는 학자적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름뿐인 형주자사로 부임해 권위가 없던 시절 냉정하게 취할 수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모략으로 취하다 강대해진 세력으로 휘몰아쳐 마무리하는 솜씨는 명쾌했다. 이 과정을 보면 기본적인 용기나 결단력이 없는 인물이라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 권위와 힘이 주어진 시점에 이르자 오히려 그는 하락세에 빠졌다. 눈앞에 놓인 길이 적었던 시절에는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지만, 여러 갈래의 길이 보이자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지극히 안정적인 길만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말년의 언동을 보면 유표 자신도 자신의 행보가 결코 좋지 않은 것은 미리부터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분야에 대해서는 결코 과감하지 않았고 남을 믿지도 않았다. 채모와 그의 양양 파벌에 휘둘린 것을 감안할 수도 있지만 우두머리는 유표 자신이고 결코 바지사장도 아니었다. 인물이 채모만은 아니어서 감녕이나 [[문빙]], [[황충]], [[장수(삼국지)|장수]], 유비 일파 등 뛰어난 장수들과 인연이 있었으나 써먹지 못했다. 군사세력은 군대를 동원해야만 하는 시점에서 이용하고 그 이후로는 결코 처음 기용한 세력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특히 다른 장수들은 몰라도 유비 일파는 전국적으로도 맹장 집단임이 검증이 끝났으나 결코 자신의 권력과 통제력을 놓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달리 보면 자신의 수명을 직감하고 이에 걸맞은 행동을 한 것으로도, 지나친 의심과 속좁음과 우유부단함으로, 혹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결코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표가 군사에 무지하다면 유능한 군부인물을 키우다 되려 그들에게 먹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으며, 그들과 갈등이 생긴 순간 외부 세력에게 간단히 잡아먹히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흔 [[유장(삼국지)|유장]]과 [[한복(삼국지)#s-1|한복]]이 이 과정을 통해 몰락했다. 즉, 유표 자신도 알고 있는 유표의 딜레마는 정치적인 능력과 군사적인 능력이 극단적인 유표의 특성에서 발생한 것이다. 어느 순간 내부 파워 게임이 무너졌다 하지만 본질적인 권위 그 자체는 멀쩡했던 유표는 얼마든지 군사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역량은 있었다. 이게 없었으면 유비가 군사를 내자고 채근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천천히 세력을 성장시키고 나니 이제 날로 먹을 수 있는 세력은 영양가도 별로 없는 무리밖에 남지 않았다. 이 때 양양 세력 대신 다른 무장들을 믿고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주자니 유표는 결코 어떤 세력의 군사적 입안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본인의 군사적 역량이 없다시피하고 과감한 판단력이 부족했던 게 가장 큰 단점. 그렇기에 양양 세력이 아닌 다른 세력이 실패하면 유표는 정치적으로 크게 수세에 몰리게 되며 이는 사실 정치밖에 없는 유표의 모든 것이 약화된다는 것과 동일하다. 이렇게 놔두면 양양 세력의 독주를 방관하게 되고 천천히 다른 거대 세력에게 숨통이 조이지만, 지도자로서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 군사에 대한 판단 능력이 없다는 것이 유표의 딜레마이다. 전국적인 검증도 끝났고 자체적인 전투 행정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어서 정치적으로도 그저 군사를 모아서 가져다주는 것 외에는 큰 신경을 써줄 필요도 없는 유비 일파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이들이 딴 맘을 먹으면 유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실제로 유비는 조조가 서주로 가라고 준 병력을 그대로 꿀꺽한 전과도 있다. 물론 유비가 조조와 숙적 관계인 것은 유비의 행보도 그렇고 황제의 밀서도 그렇고 명확하지만 유표와 숙명적 동반자 관계도 아니기 때문에 유표가 전폭적인 지지하기에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후의 전개를 보더라도 유비를 신뢰하는 선택을 한 유장은 유비에게 잡아먹힌다.] 결국 유표는 도무지 알지도 못하는 일에 도전할 수 없어서 발로 지휘해도 날로 먹을 수 있어서 딱히 밀어줄 필요도 없는 애들을 제거하는 것 외에는 자신이 가진 확실한 능력인 화려한 의전과 뛰어난 학문으로 얻은 권위로 군사 세력을 유지하고 통제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물론 난세의 지도자로서 심각한 결점인 군사적 무능에도 불구하고 유표가 형주를 장악하고 군벌 정치 시대의 유력 주자로 등극한 데에는 적지 않은 행운이 따르기도 했는데, 형주를 둔 원술과의 대립은 괴씨, 채씨의 협력을 얻어내며 비협조적이던 호족들을 신속히 모살한 정치력과 원소와 손잡아 원술을 압박하는 외교력을 동원한 승리로 볼 수 있지만 원술군 최고의 맹장이었던 손견의 존재는 거병 초기 유표의 가장 심각한 위협이었다. 유표는 손견이 유시에 맞고 전사하면서 혼란에 빠진 원술군을 정리하며 형주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 유표에게 도전했던 장제 또한 유시에 맞고 전사하면서 장제의 잔당들이 유표에게 회유됐으며, 남부의 4군을 거느리고 반기를 든 장선에게도 크게 고전하다 장선이 병으로 죽으면서 승기를 잡는 등 지도자로서 군사적 능력을 시험받는 위기의 순간마다 대립 세력 수장의 사망으로 승기를 잡으며 더욱 체급을 키워 가는 행운이 세 차례나 반복되기 때문. 천하에 야심이 없는 얼굴을 하나, 뒤에서 1백인의 자객을 부린다고 평가되며 [[관도대전]] 당시 [[손책]] 암살의 배후로까지 묘사되는《[[창천항로]]》의 유표 상은 이런 측면을 재해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후계자 분쟁도 마무리짓지 못한 것도 큰 흠이다. [[유비]]의 지지를 받는 큰 아들 [[유기(삼국지)|유기]]와 유표의 치소 양양의 유력 호족인 [[채모]][* 채모가 유종의 외삼촌이란 건 연의의 설정이고, 채부인이 유종의 모친인지 여부는 정사상으로는 불분명. 확실한 것은 채모의 조카와 유종이 결혼하여 인척 관계를 맺은 것이다. 여담으로 채모의 [[황월영|또 다른 조카]]와 결혼한 [[제갈량]]은 유종의 사촌 동서가 된다. 다만 삼국지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다 알듯이 이 사람은 채모와는 적이었던 유비의 골수 심복이 된다.]의 후원을 받는 둘째 아들 [[유종(삼국지)|유종]]이 대립한다. 이 때문에 유표가 죽은 후 채씨 호족을 등에 업은 유종이 형주의 후계자리를 차지하지만, 당연히 장자이므로 계승 권리가 충분하고 나름대로 인망도 얻어 후계자로서 결격 사유가 전혀 없던 유기를 내버려두고 차남인 유종을 후계자로 삼았으며 거기다가 명색이 장자인 유기를 아무 명분도 없이[* 제갈량이 유봉을 죽인 일은 유봉이 관우의 죽음에 너무 깊게 연루되어있다는 명분 정도는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그래도 유비는 유봉을 아꼈으나 제갈량은 유비의 후계 문제에서 유표꼴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명분 상으로는 관우를 죽게 만든 원흉이라 하고 유봉을 제거해 촉한이 유선파와 유봉파로 찢어지는 것을 미연에 차단했다.]박대까지 하니 호족들을 비롯, 형주 사람들 대다수가 유기를 동정하고 친 유기(+후견인 유비), 반 유종(+후견인 채모)으로 인심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표가 죽을 무렵이면 유표와 연대해 형주를 지배하던 양양의 친 조조세력 괴씨, 채씨 등을 빼곤 형주의 호족들과 백성 다수가 강하로 내려간 유기와 전방에 주둔하던 유비에게 기울게 된다. 심지어 채모의 근거지인 양양의 호족들과 백성들 대다수마저 조조에 대한 항복을 기습적으로 결정한 유종과 채모를 비롯한 채씨 세력을 버리고 유비에게 귀부하며 유종과 채씨 세력은 그걸 전혀 막지 못했던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채모 등 친 조조파의 조언에 유종은 그런 유비를 두려워해 조조에게 항복한다는 사실도 유비에게 알리지 않고 조조에게 그 넓은 땅을 고스란히 내주고 만다. 이렇게 유표 사후 유표의 세력이 유기파와 유종파로 찢어져 버렸고 결국 유종파의 수괴 채모는 조조에게 항복했으며 유기파의 수괴 유비는 되려 [[적벽대전|손권과 연합하여 조조를 적대하고 이에 대한 전쟁]]까지 벌인다. 한편 이 과정에서 무서울 정도로 뛰어난 정치수완을 보여준 것은 [[제갈량]]. 유비가 유표의 식객으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비를 유표로 인해 죽은 손견의 아들과 연합시키는 무시무시한 외교능력을 보여준다. 이 때 제갈량은 손견이 죽은 일에 대한 모든 원인과 책임을 황조 단 한 사람에게만 떠넘기고 유표는 원래 정복이나 전쟁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점을 어필했는데 이게 손권에게 먹혔다. 거기다가 유종 세력 내부에서조차도 양양의 괴씨, 채씨 세력 같은 친조조 세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진춘추에서 나오길 [[유종(삼국지)|유종]]이 항복한 후 "조조는 이미 장군의 항복을 얻었고 유비는 달아났기에, 필히 해이해져 방비를 하지 않을 것이니, 가벼운 무장으로 단기로 나갈 것입니다. 만약 제게 뛰어난 병사 수천만 주셔서, 험준한 곳으로 요격하면, 가히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를 사로잡으면 위엄은 천하에 진동하니, 앉아서 범처럼 걸어나간다면, 중원이 비록 넓다 한들, 격문을 돌리는 것만으로 평정할 수 있으니, 다만 한 번의 승리만을 거두어서 금일 보전하여 지키는 게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기회는 만나기 어려우니 놓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유종의 장군 [[왕위(삼국지)|왕위]]가 한다. 이 발언에서 몇 가지를 알아낼수 있는데, 첫째, 유표가 생전에 조조에 대한 투항을 거부했던 것처럼 유기와 유비뿐만 아니라 친조조 세력인 채모, 괴월 등에게 추대받아 형주를 이어받은 유종 세력 내부에서조차도 반조조의 기류가 분명하게 존재했다는 것, 둘째, 당시 유종이 조조군에 항복했어도 정예 수천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런 군세를 요청할만한 위치에 있는 장군이 반조조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즉, 유종 세력 내부에서도 물주인 양양의 괴씨, 채씨 호족들 외에 조조에 적극적으로 찬동한 세력만 있었던게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유종의 급작스런 항복으로 덩달아 항복했던 유표의 부하 관리와 군사들 대부분이, [[적벽대전]] 이후 패했다해도 아직 황제의 권위를 등에 지고 있는 조조를 버리고 손권도 아니고 유기의 뒤에 있다가 그가 죽자 자연스레 그 세력을 흡수한 반조조 세력의 상징 유비에게 귀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실제로 조조가 내려오자 형주의 인심은 유종보다 [[유비]]를 따랐던 것도 사실이고, 왕위 같은 이가 했던 발언과 더불어 항복한 유종 세력에서도 유종의 후원자들이 작당해 벌인 기습적 항복에 어쩔수 없이 수긍했을 뿐이지 반조조 세력이 상당했고, 이걸 유비가 대안이 되어 모조리 흡수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당시 유표의 옛 부하들을 받아들이는데 수가 워낙 많아 유비가 다스리던 치소 공안이 좁아 손권에게 땅을 청구했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유표의 후계자 선택은 자신이 일군 형주땅을 남에게 주는 꼴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종이 아닌 유기를 후계자로 삼는 것도 문제인게, 유기를 후계자로 낙점하는 건 유종을 선택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 유기는 채씨 일가와 불구대천의 원수였고, 그 채씨 일가는 형주에서 세력과 존재감이 어마어마하게 큰 데다가 형주 바깥까지 명망이 있었다. 더 나아가 채씨 일가는 형주 군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시각에 따라서는 유표가 살아있을 때 형주는 유표의 정치력 + 채씨 일가의 군사적 능력으로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유종과 채씨 일가는 여차하면 내전을 일으킬 능력이 있었고, 유표가 이들을 무시하는 건 불가능했다.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나고도 내전을 일으킬 능력은 없었던 유기와 대조되는 부분이며, 이런 상황에서 유기는 더더욱 후계자로 선택할 수 없다. 결국 유표의 후계 구도는 유기에게 물려줘도 문제고 유종에게 물려줘도 문제라는 막장 그 자체인 상황이었고, 군주로서 이를 제어하지 못한 유표의 책임이 클 수 밖에 없다. 본인의 군사적인 능력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유표는 그 난세의 시대에서 자신이 지배하는 형주를 매우 평온하게 지배했다. 유표가 지배하던 시기 형주는 난세의 시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로워 여러 인재들이 잘 자라날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유명한 [[제갈량]]이나 [[방통]]도 이러한 형주의 학문적 배경에서 탄생한 인재들이었다. 유표 자신부터가 건안 시대 8준에 들어갈 만큼 학식도 뛰어나 당대의 명현들이 형주로 모여들 정도. 유표 사후에 형주는 갈갈이 찢겨지다 못해 조조, 유비, 손권 세력의 형주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형주는 말 그대로 개박살이 나버렸다. 가후의 평가는, 평화 시기에 태어났으면 유표는 결코 그 자신의 단점이 드러날 일이 없었을 인물이라고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오쩌둥]]은 평소 사서를 즐겨 읽었는데 [[대장정]] 와중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특히 마오쩌둥은 [[자치통감]]을 즐겨 읽었는데, 범엽과 사마광의 평이 인상깊었는지, 유표에 대해 평가하기를 '''"이 자는 [[인형]]과 같은 [[인간]]이다."'''라고 대차게 깠다. 하지만 유표가 인형과 같았다면 결코 형주를 제패하고 죽을 때까지 영토를 유지하고 늘리며 치적을 쌓으며 학문을 진흥시킬 수는 없었을 테니 부당한 평가임은 틀림없다. 마오쩌둥이 가진 군사적 능력과 과감함은 없지만, 백성을 통치하는 내정 능력은 유표가 마오쩌둥보다 한참 위였음을 부정하기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