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화부인 (문단 편집) === 죽음 === 기원전 24년 8월 ([[추모성왕]] 14년), [[부여]]에 남아있던 유화는 아들인 추모성왕이 건국한 [[고구려]]에 가지 못하고 결국 부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금와왕은 태후의 예로써 유화의 장례를 치르고는 신묘를 지어 주었다. 이후 [[고구려]]에서는 유화를 시조인 추모와 더불어 시조신으로 섬기며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을 보면 [[태조대왕]][* 태조대왕 본인의 어머니 [[부여태후]]도 부여 출신이고, [[대무신왕]]에게 시집온 [[차비 해씨]]도 부여 출신인 등 고구려 초기에는 부여 왕실과의 통혼이 이루어지기도 했던 듯.] 때에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유화부인의 묘에 제사지냈다고도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후로도 고구려는 시조신들에 대한 제사를 거르지 않았거니와, 그 묘도 그대로 부여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