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육기 (문단 편집) === 옹호 === 육기는 혼란했던 위진 시대를 살았던 시인이다. 그는 [[오멸망전|오나라의 멸망]] 이후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애썼지만, 삶은 순탄치 못했으며 끝내 정치적 대립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의 시들은 어지러운 시대와 고단한 개인의 삶이 반영된 애상적인 정조가 주를 이룬다. 또한 스스로 [[강남(중국)|'수향(水鄕)의 선비']]라 일컬을 만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결국 그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사는게 낫다는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시를 분석해본 이들은 육기가 망국인 오나라의 신하로써 몰락한 가문을 되살려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육기의 시들은 그의 고단했던 삶을 반영한 듯 슬픔의 정조가 주를 이룬다. 아울러 패망한 가문의 후예로 뜻을 펴지 못하는 아쉬움과 상실감이 다른 한 축을 이룬다.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지만 그것은 세계의 본래적인 비극성에 대한 인식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영화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좌절이 생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으로 나아간 것이다. 가령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는 것은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오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굳이 이미 장수로써 오나라에 벼슬하다가 비명에 죽은 형들 대신 가문을 일으키려고 발버둥 칠 필요는 없었을테고, 장강 남쪽에서 동생과 함께 성공한 문사로써의 삶을 살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나라가 멸망하고 그의 가문도 몰락함에 따라 그는 자신의 그릇에 맞지도 않은 [[서진|북쪽 조정]]에서의 출세에 집착하여 스스로의 운명을 망친 격이 되었다. 289년 육기는 남방의 인재를 발탁한다는 서진의 정책에 따라서 다시 낙양으로 갔다. 육기는 조국이 멸망한 마당에 낙양에서 다시 가문을 부흥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패망국 출신으로 전승국의 수도에서 입신을 도모하는 처지에서 오는 고충이 많았다. 게다가 당시 낙양의 문화적 분위기를 주도하던 명사들과도 원만한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낙양에서의 생활이 상당히 외롭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문학이 끊임없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게 된 배경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당신은 오나라의 명문가 출신이지 중원의 명문가 출신은 될 수 없다'고 빈정거린 노지와의 일화나 육기 스스로도 인정한 그의 문학작품이나 발언에서도 나오듯이 그가 아무리 그곳에서 발버둥쳐봐야 망한 나라의 유민으로써 나그네 신세에 불과했지만 [[트라우마|젊은 시절의 망국과 가문의 몰락으로 인한 좌절]]에서 육기는 끝내 벗어나지 못했고 그것이 어떤 방법을 쓰던간에 성공하려는 집착으로 이어졌다. 그는 "원칙대로 살아가면 멀리까지 닿지 못하는 법 / 반듯한 걸음걸이로 어찌 남을 따라가리"라고 말한다. 그가 항상 원칙을 견지하는 근엄한 유학자라기보단 실존의 순간 앞에서 항상 가치관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워 한 문인에 불과했고[* 즉 그는 명교에 무조건 매인 인물은 아니었다. 육기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사상이나 내용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언어와 문자의 형식적 아름다움이다. 즉 도덕이나 인격과는 무관한, 예술로서의 문학 그 자체의 미감이다. 유가(儒家)에서는 표현의 미감을 경시해 단순하고 투박한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했지만, 육기는 유가 문학 사상의 제약을 넘어 심미성을 인정한 것이다. ≪문부≫에서 그가 문학 창작의 가치와 즐거움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고 태생적으로 문학도써 일반적인 유학자와는 다른 사고 방식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가 가장 중요시한 성공을 위해선 정도만을 갈 수 없다고 인식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학려화정|강남의 학이 우는 화정]]을 다시 그리며 최후를 맞은 육기의 모습은 망국의 유민으로써 본연의 정체성이 타향인 [[서진|북쪽]]이 아니라 [[오(삼국시대)|옛 망국]]과 강남에 있었음에도[* 그의 글에서는 오나라의 태조인 [[손권]]을 나의 황제(我皇), 나의 대황제(我大皇帝) 라고 부르는 글이 많다. 그가 마음으로 진짜 섬긴 황제가 누구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망집에서 벗어나지 못해, 끝내 원래의 정체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최후를 맞은 한 인간의 비극을 보여준다. 오나라가 멸망한 뒤 육기의 인생은 평생 문묵(文墨)의 향기가 나는 옷만 입어야 했으나, 자기에게 걸맞지도 않은 정치인의 옷을 입었고, 다른 나라의 정계에서 어떻게든 출세해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발버둥치다가, 끝내 자기와 맞지도 않은 짓을 하며 비참하게 몰락한 한 문사의 허망한 인생에 불과했다는 것을 육기 스스로도 유언에서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고, 알면서도 거기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으니 그의 인생은 비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이런 면에서 육기와 정확히 반대로 행동한 사람이 고옹의 손자인 고영이다. 고영은 한편으로는 자기 보전을 잘 하면서도 세세한 면에서는 충이나 의나 덕을 충분히 챙겨 처신했기에 출세에 성공하면서도 덕이나 재주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받으며 제 명에 살다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