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육서 (문단 편집) == 특징 == [[진나라]]는 [[분서갱유]]를 벌여 웬만한 경전들을 태워버렸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초한전쟁]]이 벌어져 [[중국]] 학문계에 호사난상[* 몹시 뒤엉키어 어수선하게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의 시대가 찾아왔다. [[한나라]] [[문제(전한)|문제]] 시기에 들어서 혼란이 수습되자 문제는 한동안 탄압받았던 유학자들을 다시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말살된 기록들을 복구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절반 정도는 학자가 몰래 숨겨왔던 경전이나 공자 집에 들어찬 경전에 적힌 고문을 해석하던 고문파, 다른 절반은 끝까지 찾지 못해 입으로 전승되오던 사실을 기록해 [[예서]]로 남겨놓은 금문파로 연구자가 나뉘었다. 이들은 연구 방법이 달랐으므로 학풍 역시 달랐는데, 고문파는 글자 해석부터 어려웠으므로 고답적으로 정론을 파고들었고, 금문파는 따로 해석할 거리는 없었고 내용의 이해에 어려움이 없어 현실적인 방향으로 발전했으나, 참위설이나 음양오행설을 가지고 억지해설을 늘어놓는 등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를 고문파의 일원이었던 후한의 [[허신]]이 문자의 구조를 분석하는 기법을 최초로 들고 온 《[[설문해자]]》를 집필하여 [[소전]]체를 파고들어 의미를 분석하는 기법을 보여주며 논란이 종결되었다. 이때 나온 기법의 하나가 바로 육서. 즉 설문해자에서 최초로 육서의 개념이 정립되었으며, 설문해자의 설명이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한자를 가르치는 데 사용된다. 문제는 설문해자의 설명이 매우 간결하고 모호하다는 것이다. 설문해자의 육서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一曰指事。指事者,視而可識,察而見意,上下是也。 >二曰象形。象形者,畫成其物,隨體詰詘,日月是也。 >三曰形聲。形聲者,以事為名,取譬相成,江河是也。 >四曰會意。會意者,比類合誼,以見指撝,武信是也。 >五曰轉注。轉注者,建類一首,同意相受,考老是也。 >六曰假借。假借者,本無其字,依聲託事,令長是也。 > >첫째는 지사다. 지사란, 보면 부호임을 알 수 있고 살피면 그 뜻이 보이는 것으로, [[上]]과 [[下]]가 그러하다. >둘째는 상형이다. 상형이란, 사물을 그 물체의 굴곡을 따라 그려낸 것으로, [[日]]과 [[月]]이 그러하다. >셋째는 형성이다. 형성이란, 사물로 뜻을 삼고 비유한 것을 취해 서로 이루는 것으로, [[江]]과 [[河]]가 그러하다. >넷째는 회의다. 분류를 나란히 하고 뜻을 합쳐서 가리키는 바를 나타내는 것으로, [[武]]와 [[信]]이 그러하다. >다섯째는 전주다. 전주란 같은 분류를 한 수(首)에 세워 같은 뜻을 서로 주고받는 것으로, [[考]]와 [[老]]가 그러하다. >여섯째는 가차다. 가차는 원래 그 글자가 없어 소리에 의거해 사물을 의탁하는 것으로, [[令]]과 [[長]]이 그러하다. 개념을 정립하는 자의 설명치고는 뭔가 내용이 비정상적으로 부실하다. 글자수를 네 글자로 하고 마지막 글자의 압운을 맞추는 데 신경 쓰느라 설명은 물론 예시까지 부실해진 것이다. 이러다 보니 후대에 육서의 개념을 더 명확히 하고자 하는 한자학자들은 설문해자의 모호한 설명에 치를 떨었다. 문자학자 최규화는 <한자해례 1800+>라는 책에서,허신이 육서를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최규화는 육서란 한 가지 글자가 여섯 가지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지, 글자 하나하나를 각각 다른 항목으로 구별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