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육손 (문단 편집) === 손권과의 말년 === 오주전에 따르면 236년 겨울 10월, 파양의 도적 [[팽단]]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주전에 따르면 237년 봄 1월, [[호종]]과 [[고옹]]이 효와 충은 병행할 수 없다고 해서 [[손권]]은 부모가 죽었을 때 근무지를 이탈하면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만든다. 그런데 이후 [[맹종]]은 모친상을 당해 달려나가 상을 치룬 후 스스로 무창에 돌아와 감옥에 갇혀 형을 받기를 청했는데, 육손이 평소 그의 행동에 대해 서술하고 부탁하자 손권도 결국 그의 직위를 한 단계 강등만 시키는 선에 끝내 앞으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오주전에 따르면 237년 2월, 육손이 팽단 등을 토벌하여 그 해에 모두 격파시켰다. 237년, 중랑장 주지(周祗)가 파양에서 병사를 소집할 것을 요청했다. 손권은 이 일을 육손에게 물었다. 육손은, 이 군의 백성들은 쉽게 동요하고 안정시키기 어려우므로, 소집에 응하도록 할 수 없다면 아마도 도적으로 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지는 병사를 모집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 군의 백성 오거 등은 과연 도적이 되어 주지를 살해하고 여러 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예장군과 여릉군의 옛날부터 있던 사악한 백성들은 함께 오거에게 호응하여 도적이 되었다. 육손은 이 소식을 들은 즉시 토벌에 나서 격파시켰다. 오거 등은 서로 이어서 항복했다. 육손은 정예 병사 8천여 명을 얻었고, 세 군을 평정시켰다. 진무전에 따르면 파양군의 백성 오거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성곽을 공격해 함락시키니, 속현들이 요동하니, [[진표(삼국지)|진표]]가 바로 경계를 건너가 토벌하니, 오거는 격파되어 패배하였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육손이 진표를 편장군에 배수하고, 봉작으로 올려 도향후로 하며, 북쪽 장갱에 주둔하였다. 오주전에 따르면 당초, 손권은 교사 [[여일]]을 신임했는데, 여일은 성격이 가혹하고 법을 매우 엄하게 집행했다. 태자 [[손등]]이 이 점을 자주 간언했지만,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 때문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육손전에 따르면 당시 중서전교로 있던 [[여일]]이 요직을 훔쳐 차지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위세와 복을 마음대로 만들었다. 육손은 태상 [[반준]]과 함께 마음 속으로 걱정하고 이에 관한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이후에 손권이 여일을 주살하자 깊이 자책했다. 보즐전에 따르면 후에 중서 여일이 문서를 감사하게 되었는데, [[보즐]]이 탄핵한 자가 많았다. 보즐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승상 고옹, 상대장군 육손, 태상 반준은 심장과 넓적다리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의 신하들입니다. 이 세 명의 신하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을 뿐, 어찌 감히 독자적인 세력으로 위협하여 하늘을 저버리겠습니까? 이로 미루어보아 이미 이 시점부터 손권은 육손 등 신하들을 꽤 경계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주전에 따르면 이후에 [[여일]]의 간사한 죄악이 발각되어 참살 당하게 되었는데, 손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자책했으며, 곧 중서랑 원례를 시켜 여러 대장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도록 하고, 이 기회에 그 당시의 정사에 있어서 고쳐야만 할 점에 관해 질문했다. 그때 [[사연]]과 [[사굉]] 등이 각각 마땅히 해야 할 일에 관해 진술하여 유익한 사업을 일으켜 바꿔 보려고 했다. 손권은 이 일을 육손에게 심의하도록 했다. 육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며, 강성함은 백성들의 힘에서 나오고, 재력도 백성들에게서 나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을 안녕되게 하고 구제하십시오. 그런 연후에 다시 생각 하십시오. 오주전에 따르면 241년 가을 8월, 육손이 주에 성을 쌓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