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육손 (문단 편집) === 초기 생애 === 육씨는 [[오의 사성]]이라 불리는 강동의 유력한 호족으로 육손은 그 방계로 태어났다. 육씨세공에 따르면 육손의 조부 육우는 배움에 정진하여 성문교위 직책을 맡았다. 육손의 아버지 육준은 육가 집안을 이루고 관직은 구강도위까지 이르렀다. 육손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당조부인 여강태수 [[육강]]의 임지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집안의 대표이던 육강이 [[원술]]의 군량 요청을 거절하여 당시 원술의 휘하에서 일하던 손책에게 공격을 당하니, 그는 아들인 [[육적]]과 육손 등 육씨 일족을 모두 오현으로 피난시켰다. 결국 196년에 '''육강이 손책과의 싸움에서 져서 죽자'''[* 즉, 친인척이 손책한테 죽은 것이다. 그런데 육손은 훗날 손권의 밑에 들어가고 손책의 딸과 결혼까지 한 게 아이러니다.] 그의 뒤를 이을 육적이 너무 어렸던 덕에 육손이 육적을 대신해 집안을 관리했다.[* 주목할 점은 육손도 육적보다 고작 5살 많았을 뿐 이 때 나이는 성년도 되지 않은 14세였다는 점이다.] 손책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뒤를 이은 [[손권]]이 권력을 잡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203년, 육손은 21세의 나이에 손권 아래의 막부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서조령사를 거쳐 해창현의 둔전교위로 임명되어 해창현의 정무를 관리했다. 육손은 해창현에 큰 한재가 닥쳤을 때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을 권유하고 감독하여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육손은 손권에게 오군, 회계군, 단양군의 숲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소집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육손은 새로 수집한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예전부터 회계의 문제거리였던 산적의 우두머리 [[반림]]을 토벌하고 남은 무리의 항복을 받아내니 육손이 이끄는 병사는 2천 명까지 그 수가 늘었다. 하제전에 따르면 216년, 파양의 백성 [[우돌]]이 조조의 인수를 받고 백성들을 변화시켜 도적으로 만들었으며, 능양현, 시안현, 경현이 모두 우돌과 서로 호응했다. [[하제]]와 육손은 우돌을 토벌하여 무찔러서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두려워하며 복종했다. 단양의 세 현은 모두 투항했으며, 정예 병사를 총 8천 명 얻었다. 육손은 정위교위로 임명되었고, 군대를 이포(利浦)에 주둔시켰다. 하제는 안동장군에 임명되고, 산음후로 봉해졌으며, 밖으로 나가 장강가에 주둔하여 부주 상류 지역으로부터 환까지 지휘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