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육조시대 (문단 편집) == 상세 == 육조시대의 6조는 다음의 여섯 왕조를 가리킨다. * [[오(삼국시대)|오(吳)]](229-280년) /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 ([[서진|서진(西晉)]]의 통일왕조 기간(280-316년)) * [[동진|동진(東晉)]](317-420년) / [[오호십육국시대]] * [[송(육조)|송(宋)]](420-479년) / [[남북조시대]] * [[제(육조)|제(齊)]](479-502년) / 남북조시대 * [[양(육조)|양(梁)]](502-557년) / 남북조시대 * [[진(육조)|진(陳)]](557-589년) / 남북조시대 이 여섯 왕조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양쯔강|장강(長江)]]을 중심으로 [[강남(중국)|강남]]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서도 장강 하류인 [[양주(중국)|양주]](揚州)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을 담당했으며, 중류인 [[형주]](荊州)는 국방의 중심을 담당했다. 상류인 [[익주]](益州)는 263년 [[촉한]] 멸망 이후 독립 정권이 들어섰다가 유송 이후로 남조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역시 생산과 방위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결국 554년 [[서위]]가 차지하면서[* 다만 이 때 쯤이면 이미 [[북주]]로의 선양이 확정적이었다. [[서진]]을 건국한 [[사마소]]가 그랬듯이. 둘 다 익주 정벌로 정통성을 강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연 서진의 통일 때처럼 촉 정벌 후 몇십년 지나지 않아서 북조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북조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존재감은 낮았지만 [[교주]](交州) 역시 종종 [[베트남인]] 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대체로 남조의 영향권에 속했다. 그리고 이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국]]하고도 교류했다. 과거 [[강남(중국)|강남]] 지역은 (본격적인 개발이 진행되기 이전이라 중국의 인구 • 경제 중심지가 되는 [[남송]] 이후 ~ 현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고온 다습하여 농업에 유리하고 그만큼 인구 부양력이 높은 양주 지역이 육조 세력의 본거지였고, 강북의 세력이 이 양주 지역으로 진격해 오는 길목인 형주가 근거지인 양주를 방어하는 군사적 거점의 구실을 한 것이다. 당장 [[삼국지연의]]만 보더라도 [[적벽대전]] 등을 통해 형주가 강북 세력이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양주를 공격해오는 길목이었으며, 이 때문에 [[주유(삼국지)|주유]], [[노숙]], [[여몽]], [[육손]] 등 오의 쟁쟁한 대도독들이 주로 형주에 주둔하여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익주는 장강 하류의 양주가 본거지인 육조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영향권 안에 넣기에는 좀 멀다. 형주야 양주에 인접해 있으니 비교적 통제가 용이하지만, 또 그 형주 너머에 있는 익주는...[* 삼협은 나오기도 어렵고([[유비]]의 [[이릉대전]]) 들어가기도 어렵다.([[촉한멸망전]] 당시의 [[육항]])] 물론 익주를 손에 넣으면 영토가 넓어지고 익주의 풍부한 경제력과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국력이 신장되겠지만,[* 이걸 해내고 나아가 이 기세를 바탕으로 일시적이나마 관중과 하남까지 되찾고 ([[유송]]의 건국 정당성을 끌어올렸으며) 북조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게 바로 [[송무제|유유]]. 괜히 명장 소리를 들은 게 아니며 만약 여러 악재와 실수(후방 내정을 담당한 동료의 급사, 잘못된 인선, 부하들의 내분 등)만 없었어도 동진(혹은 유송)이 천하를 통일하는 초유의 사태를 실현할 수도 있었다(!).] 대신 한중 방면에 또 하나의 전선이 열려서 방어 부담 역시 그만큼 커지게 되는 것. 물론 익주 지역은 분지라서 방어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긴 한데, 또 그런 만큼 여기를 지키는 인물이 본국에서 등을 돌리면 답이 없어진다. [[이백]]도 촉도난에서 "지키는 이가 친하지 않으면 [[승냥이]]와 다를 바 없어진다."고 노래했을 정도. 결국 강남의 육조 정권 입장에서 익주 지역은 있으면 좋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계륵]]스러운 지역이었던 것. 그리하여 익주에 해당하는 지역은 독립 정권인 [[촉한]]이 섰다가, 북조 정권에 편입되어 [[조위]] · [[서진]]의 차지가 되고, 다시 독립 정권인 [[성한]]이 섰다가, [[동진]]에게 점령되고 이후 북조 정권이 점령해서 [[서위]] · [[북주]] · [[수]]에게로 이어졌다. 북조 정권 입장에서는 남조의 중심 양주만큼 파촉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었고, --물론 [[진령 산맥]]을 넘고, 다시 [[검각]]을 돌파해야 하는 난이도는 일단 제쳐놓자-- 고대부터 중국의 중심지였던 관중과 (지도 상으로는) 가까우며 익주를 먹으면 장강 상류에서 남조를 치고 내려갈수 있고 익주의 풍부한 경제력과 관중 지역이 결합하면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낸다.[* 또한 남조의 중심지인 형-양주보다 북조의 중심지인 중원/관중이 익주(파촉)와 더 가깝다는 것은, 만약 남조가 파촉(익주)을 장악할 경우 북조의 입장에서는 아주 골치아픈 제 2 전선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촉의 생산력은 충분히 십만 단위의 대규모 병력을 부양할 수 있고, 이 병력이 한중을 넘어오면 북조의 중심지인 장안이 위협권 내에 들어가게 되는 것. (물론 이것이 바로 제갈량과 강유가 줄기차게 시도한 북벌의 핵심이다.) 결국 남조의 입장에서 보면 '''파촉을 장악하고 한중 루트로 장안 직격을 시도하는 것'''은 "할 수 있으면 좋긴 좋지만 그러다 파촉을 다스리라고 보낸 인물이 본국에서 등을 돌려버리면 괜히 죽써서 개 주는 꼴이 될 수도 있는" 좀 애매한 면이 있는 전략인데 비해 북조의 입장에서 보면 파촉에서 한중을 넘어 장안을 노리는 저 놈이 양주에 있는 그 놈 부하든 반독립 세력이든 여튼 누구에게든 관중을 뺏기면 나라가 거덜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 당장 파촉과 관중을 합치면 그 옛날 전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강역이며 초한대전 당시 한나라의 강역이다. 두 쪽으로 분열된 화북과 전 중국을 통일한 것도 관중 + 파촉을 얻은 북주와 그 뒤를 이은 수였다. 문화적으로는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시화문화가 발달했는데,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왕희지]], 고개지, [[도연명]] 등이 있다. 또한 [[유교]]가 윤리적인 기능을 상실한 사이에 형이상학적인 [[도교]]가 크게 번성했으며, 후한 때 전래되었던 [[불교]]도 비슷한 이유로 조정의 지지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 반면 북쪽의 정권들에서는 불교가 번성하면서도 가끔씩 불교를 박해했으며, 특히 [[삼무일종]] 중 2가지 박해가 발생하였다. [[북위]] [[태무제]]와 북주의 무제 때였다. [[달마]]가 중국에 와서 [[선종(불교)|선종]]의 시조가 된 것도 바로 이 [[양무제]] 시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