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극영 (문단 편집) == 생애 == 1903년 9월 6일 서울 소격동 42번지에서 태어났다. [[서울교동초등학교|교동공립보통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출처: 1984년 5월 5일 KBS에서 방송된 《윤극영, 푸른하늘 은하수60년》).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동양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성악을 배웠다. 1923년 [[도쿄]]에서 [[방정환]]이 조직한 색동회에 참가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중 희대적이게도 조선어 가사를 붙인 노래들을 작곡하여 어린이들에게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힘썼다. 관동 대지진에서 죽창으로 조선인을 학살하는 것을 몸으로 겪으며, 자신도 군인들에게 잡혀 어디에 갇혀 들어갔고, 자푸라기 속에 일어나 보니 머리 위에 말이 있었다고 한다. 마굿간에 잡혀 가축과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https://youtu.be/8TNnDkOg5Ls?si=4P0Ni9J9Hj8wgcNa|출처]] 전보 통신이 연결된 후 생사를 걱정하는 어머니 편지를 3개월 만에 받았다고 한다. 신변의 위협하는 경험으로 그해 서울으로 돌아와 1924년 8월에 다알리아회라는 어린이합창단을 처음으로 창단하였다. 1926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음악교사로 활동하여 어린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치게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중국]]에 머물다가 용정에서 복역되었고 1947년 텐진에서 손수레를 이끌다가 [[대한민국|남한]]으로 탈출하여 동요 '''반달''', '''설날''', '''고드름''', '''따오기''', '''꾀꼬리''' 등을 작곡하고 동시에 아동문화운동에 힘쓰며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전도사임을 표방하고 있었다가 1988년 11월 향년 85세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서울특별시에서는 [[강북구]] [[우이동]] 4.19 민주묘지 앞 삼거리 윤극영 가옥을 보존해 현재도 개방하고 있다. 묘소는 선산이기도 한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학곡마을에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