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병운 (문단 편집) == 생애 == 1927년 4월 15일 충청북도 청주군 옥산면(現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 393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장동리 392번지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52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4634&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이주했다]]. 고향에서 옥산공립보통학교(現 청주 옥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서울)|대방동]]에 위치한 사립 성남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성남중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42년 4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418|박원배]](朴源培)·[[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60322|박병양]](朴秉陽) 등 학우들과 함께 비밀결사 신진당(新進黨)을 조직했고, 평소 독서회를 꾸려 [[한국사]]를 공부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스스로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또한 방학이 되면 고향인 청주군 옥산면으로 내려와 후배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펼쳤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를 저격할 계획을 모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42년 12월,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내려온 그는 학생들을 모아 과거의 [[3.1 운동]]과 같은 거국적인 대규모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밀고자의 고발로 인해 일본 경찰 3명이 그의 집을 급습했고, 이때 집 안에서 태극기가 발견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이듬해인 1943년 봄에 인천 소년형무소에 투옥되었고, 한동안 여러 차례 취조 및 고문을 당했으며, 그해 9월 15일에는 다니던 성남중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당했다. 이후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여동생 윤순분씨의 증언에 의하면 변호사가 윤병운 선생의 아버지에게 "아들을 설득해 재판정에서 '잘못했다'고 말하면 [[미성년자]]의 신분이라서 풀려날 것이다"라며 설득을 당부했다. 그러나 윤병운 선생은 오히려 재판정에서 항일 독립의 뜻을 더 강력하게 밝혔고, 1943년 12월 18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단기 2년, 장기 4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52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4634&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아]]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결국 독립이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4월 11일]], 조사 과정에서 당한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인천 소년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여동생 윤순분씨의 증언에 의하면 윤병운 선생이 사망 한두달 전에 건강이 안 좋았는지 고향 부모님께 연락해달라고 부탁했으나 형무소에서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윤병운 선생의 당숙 윤동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형무소로부터 윤병운 선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아버지와 친척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가보았을 때, 심한 고문으로 인하여 몸이 아이처럼 작아져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