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봉춘 (문단 편집) == 일생 == 1902년 3월 23일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함경북도]] [[회령군]] 공북면 일리(現 [[회령시]] 역전동)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때 같은 동네에 살던 [[나운규]]와 친구가 되어 회령군 신흥학교[* [[회령군]]의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설립한 학교이다.]와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시|화룡현]] 명동촌(明東村)[*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즈신진(智新鎭) 밍둥촌(明東村).]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1919년 4월 초, 회령군에서 나운규·이범래 등과 함께 [[기미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해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고, 4월 19일 청진지방법원 회령지청에서 징역 4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나운규와 함께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독립군/한국|독립군]]에 투신했으며, 이듬해인 1920년에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3&docId=577688&categoryId=46623|북간도국민회]]에 가입했다. 이후 독립군의 국내 진공을 원활히 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서 나운규·김용국 등 4명의 동지와 함께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나남동(現 [[청진시]] [[나남구역]])의 [[일본 제국 육군]] 사단 본부와 회령군에 주둔한 일본 제국 육군 수비대간의 교통을 차단시키기 위해 청회선(淸會線) 7호 터널의 폭파 및 전선 절단의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대한국민회 재무부장 겸 군자금모집원이었던 한순범(韓舜範)으로부터 북간도의 장순명(張順明)·장도명(張道明)과 함께 군자금모집반 제1반원에 편성돼 함경북도 경성군에 [[http://db.history.go.kr/id/su_006_1921_01_18_0560|파견되었다]]. 그러나 1921년 1월 일명 '도판부 사건' 또는 '붉은 잉크 사건'으로 나운규와 함께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고향 회령군으로 압송되었고, 손가락이 손등 쪽으로 휘고 치아가 빠지고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그해 3월 5일 청진지방법원 회령지청에서 이른바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http://db.history.go.kr/id/su_006_1921_03_02_0070|선고받아]] 청진형무소에서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풀려난 뒤에는 회령으로 돌아와 교회에서 서무를 맡다가 친구 나운규[* 3.1 운동 당시에는 도망쳐서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2년형을 선고받아 윤봉춘보다 6개월 더 뒤인 1923년 4월에 출소했다.]로부터 자신이 나온 영화 스틸을 받으며 서울행을 권유받았다. 그는 이에 응하며 1927년에 나운규의 작품 <[[야서|야서(들쥐)]]>에서 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나운규가 조선키네마를 떠나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우자 윤봉춘 자신도 따라 <잘 있거라>에 나왔다. 그러나 그는 나운규의 독단에 반발하며 나운규프로덕션을 나간 후, 1931년 대구 대동영화사가 만든 김영찬 원작의 영화 <도적놈>의 메가폰을 잡아 감독이 되었다. 이 작품은 검열을 피하지 못했으나 간도 참변을 다룬 영화 <큰 무덤(엑스키네마)>의 감독을 맡아 일제의 검열을 회피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이 작품에 나온 진주 기생 출신의 여배우 하소양은 1929년부터 이미 결혼한 사이였으나 1933년에 이혼했다. 1931년에 이명우, 이경선, 이구영, 박제행 등과 함께 '화조영화동인제작소'를 만들어 조선고대극 제작을 위해 노력하다가 이듬해 <개화당이문>에서 김옥균 역을 맡아 나운규와 재회했다. 그는 나운규의 마지막 작품 <옥루몽(1937)>까지 나오며 나운규가 사망할 때까지 바늘과 실같이 따라다녔다. 1941년 [[최인규(영화 감독)|최인규]] 감독의 <집 없는 천사>에서 배우 활동을 잠정적으로 끝냈고, 1942년 <신개지>를 연출한 뒤 일제의 어용 영화단체 '조선영화인협회'의 참여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떠나 침묵을 지켜왔다. 1945년 8.15 광복 후 계몽문화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1947년 <윤봉길 의사>와 <3.1 혁명기> 등을 시초로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영화를 주로 연출했고, 1950년대 이후 <처녀별>, <여인천하>, <논개> 등 민족사극류 영화들을 연출했다. 그 외에 <고향의 노래> 같이 당대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1956년에는 여러 영화인단체들을 규합해 '한국영화인단체연합회'를 만들었고,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회'로 개편될 당시 초대 이사장도 맡았다. 1968년에는 [[복혜숙]]과 성동호, 김성춘, [[양주남]] 등 원로들과 함께 '한국영화최고회의'를 만드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다 1975년 10월 21일 0시, 서울 사당동 예술인마을 자택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장례는 영화인협회장으로 하여 서울 청계2가 수표감리교회에서 영결식을 치르고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축현리 기독교인공원묘역에 안장됐다가,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음에 따라 1995년 10월 1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수남(1997년 별세)과 장남 윤삼육(1937~2020) 감독, 차녀 윤소정(1944~2017) 배우 등 2남 4녀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