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승운 (문단 편집) == 생애와 경력 == 《[[맹꽁이 서당]]》의 만화가. [[순천대학교]] 만화 예술학과 전임 강사 겸임. 한국의 2세대 만화가로, 어릴 적 부친이 퇴근길에 사다 준 만화책 두 권이 계기가 되어 만화가가 될 꿈을 키웠으며, 안타깝게도 그의 아버지는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가 불명이라고 한다. 이후 큰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년 시절 효창공원 주변에 살았는데 백범 [[김구]]의 사회장을 6살 때 목격했다고 한다. 1963년 《아리랑》 잡지에 《자선영감》을 게재해서 데뷔했다. 1970년대에는 아동용 명랑 만화를 주로 그렸으며, 1983년에 《보물섬》 잡지에 9년간 역사 만화인 《맹꽁이 서당》을 연재했고, 후에 만화책으로 출판되었다. 역사 만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우연히 젊었을 적 친척 할아버지 집에 본 역사책을 읽고 흥미를 가져 역사 만화를 그려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어수선한 듯하면서도 일견(一見) 정돈된 그림체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 데뷔해서 [[길창덕]] 화백 눈에 띄어 [[신문수]], [[오원석]] 화백과 젊은 시절 같은 화실을 쓰며 만화를 그렸다. 이때 만난 앞 두 화백과 더불어 [[박수동]], [[이정문(만화가)|이정문]] 화백 등과도 친해 지금도 여행도 가고 같이 어울리는 사이라고. 윤화백의 만화책 《겨레의 인걸 100인》은 서울시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 캡슐에 같이 묻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으며, 이 작품으로 문화부가 제정한 '한국 만화 문화상' 제1회 저작상 부분을 수상했다. 심사 위원들로부터 "독창적인 화법과 화기(畵技)를 지니고 있어 창작 만화로서 우수할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교육성을 겸비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만화를 [[학습]] 저해의 요소로 평가하는 한국 교육계에서도 그의 만화는 교육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디딤돌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화백의 필치로 재탄생시킨 만화가 실릴 정도다. 하고자하는 의지가 대단해, 서재에는 3천권이나 되는 고문서와 역사 자료들이 빼곡히 쌓여있으며[* [[상도]]를 쓴 작가 [[최인호(작가)|최인호]]와 둘이 사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최인호 생전 상도를 집필하기 위해 [[임상옥]]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 윤승운의 서재에 관련 자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와 신세를 졌다고 한다.], [[한자]]에 대한 사랑도 대단해 [[성균관대학교]]에서 독학 끝에 한문 연수 과정을 수료했고, 유명한 역사 유적지를 직접 방문하는 열정도 보였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지극해서 시작한 것이 《맹꽁이 서당》이며, 어릴 적 목욕탕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연재한 것이 《꼴찌와 한심이》가 있다. 애견들이 상당히 많은데 주로 등장하는 개들은 지인이 준 [[개]] 두 마리, 해피와 설리번. 이들을 항상 표지 서두에 그리며, [[보신탕]]을 못 먹겠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다…. 역사 만화, 명랑 만화 외에도 [[종교]](특히 [[불교]])에 대한 지식도 매우 해박해, 항상 그의 만화에는 고승들의 얘기가 그려져 있고, [[증산도]]나 [[천도교]], [[대종교]]나 갱정 유도 같은 민족 종교들도 만화로 다루었다. 또한 [[천주교]] 계열 잡지인 《소년-내 친구들》에도 장기간 연재를 했으며, [[개신교]] 매체에서도 관련 만화를 그렸다. --본격 종교 만화의 [[그랜드슬램|그랜드슬래머]].-- 주로 초기 순교자들의 삶이나 조선 말기 시대 상황에 대해 많이 그렸으며, 《내 친구들》을 연재하던 [[가톨릭]] 계열 출판사(도서 출판 다솜)에서도 단행본으로 냈으나, 지금은 《내 친구들》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환상의 에피소드|단행본 역시]]... 얼마 전까지 2권은 재고가 몇 권 남아있는 게 확인되었지만 1권은….. 별개로 본인은 본래는 [[무종교]]로 [[불자#s-1|불자]]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으나, [[크리스천]]인 아내로 인해 [[신앙]]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매우 겸손하여, 만화에서 자주 자신을 환쟁이로 칭하거나 자신은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막상 만나본 사람들에 의하면 매우 아는 것이 많다고...[* 윤 화백은 [[연세대학교]] 농학과 출신이며, 정확히는 연세대학교 농업 개발원 낙농과. 평생 교육원 개념이니 일반적인 학부생은 아니지만, 당시 기준에서는 꽤 고학력이다. 별개로 한학을 배우기 위해 성균관 한림원에서 7년동안 수학하기도 했다. 사실 화백 본인이 회고한 바, 만화로는 먹고 살기 힘들고 평소 낙농에 꿈이 있어 그 쪽 관련 공부를 한 것이라고 한다. 일단 만화가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땅을 사 차차 [[귀농]]할 준비를 하려던 찰나 아버지같이 키워 준 평생 [[농부]]였던 큰아버지가 [[농사]]도 쉽진 않으니 이왕 한거 쭉 가라고 설득해 만화 쪽으로 못을 박았다고... 지금의 부인도 당시 농업 개발원 동기였다고 한다. 당시 만화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가득했을 때인데 대범하게 윤승운을 이 쪽 길로 이끌어준 큰아버지의 덕이 컸다. ] 아마도 만화를 그리면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연구해온 덕분인 것 같다. 만화 외적인 활동으로 2000년부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윤리 위원을 3년간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