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승운 (문단 편집) === 역사관에 대한 변호 === 다만 이러한 단점들은 '''작가가 활동한 시기가 1980년대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윤승운 화백이 한창 현역으로 있을 때에는 사료(史料)로 인용할 만한 물건이 《[[연려실기술]]》 정도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거의 연구자들의 전유물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시대였으니, 자료 찾는 것부터가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사학자도 아닌 만화가에게 정확한 역사적 고증 및 사실 전달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부터가 너무 가혹한 처사다. 게다가 당시 [[국풍81]] 등의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대두되고, [[환빠|환 사관]]이 힘을 얻고 있었던 시기였다. [[해동검도]]가 이 시류에 영합해 크게 흥했듯이,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그랬고, 결정적으로 국가적인 단체인 [[육군사관학교]]에서조차 '일만 년 역사 웅비하는 한민족' 같은 슬로건을 내세울 정도였으니, 이쯤 되면 윤승운 화백 본인의 역사관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기보다는 당시 시류에 따랐을 뿐이다. 더욱이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여러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미뤄 볼 때, [[광해군]]이나 [[장희빈]] 건으로 작가를 비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재평가 바람이 불기 이전까지는 작가가 묘사한 것이 당시 주류 사학계에서 인정하는 정론'''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당시 각종 [[교과서]], 학술서 등도 다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비교적 최근에 출간한 만화책에서는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주창한 왕이었다는 식으로 평이 바뀌는 등[* 다만 맹꽁이 서당이 한창 연재중일때, 광해군 재평가론은 얼마든지 있었다. 당장. 80년대 후반 방영하던 MBC 사극 드라마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편만 봐도 왜란 이후 조선을 지키자면 청을 편들어야 한다고 중립적으로 나서며 유배당한 광해군을 찾아온 [[강홍립]]([[오지명]]이 연기)이 "전하의 안목이 맞았사옵니다! 전하를 폐한 자들이 망해가는 명나라를 편들었더니만 결국, 왕이 청 태종 앞에서 머리가 피나도록 절해야하지 않았습니까? 애당초, 청나라편을 들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텐데!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당하고 이런 굴욕까지 당했사옵니다!"라고 한탄하는 게 나올 정도였다. 나중에 방영한 조선왕조실록-인현왕후에선 장희빈이 악랄하게 나와 비참하게 죽는 거와 대조적으로 적어도 광해군이 추구한 중립외교를 재평가해야 한다라고 내레이션도 나왔다.], 작가의 역사관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집필할 당시의 사관(史觀)이나 시류를 따랐을 뿐이라는 게 맞다. 일단 '''이 분은 만화가이지 역사학자가 아니'''니 말이다. 적어도 낡은 사관을 고집하고 이를 지적하는 것조차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유사역사학]]보다는 훨씬 낫다. 오히려 이 때문에 현대의 [[노론 음모론]]보다 더 나은 묘사도 여럿 등장한다. 가령 [[송시열]]을 대범하고 충성심 강한 큰 인물로 묘사하고, 임오화변의 원인도 [[이덕일]] 식의 노론 음모론과는 달리, 단순히 신하들 간의 정쟁 자체에서 찾으며, 실질적으로 사도 세자를 죽게 한 것은 영조 본인의 행동으로 보고 있다. 이런 해석은 이덕일 이전부터 주류 학계에도 등장했던 학설이다. 또한 당시에도 광해군을 꾸준히 '중립외교의 현군'으로 재평가하자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강했으나(특히 노태우 시절의 동구권과의 북방외교의 영향으로), 윤화백은 '광해군은 세자시절에 겪은 울분에 정신이 망가져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게 된 혼군!' 이라는 기존의 평가를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늘날 다시 광해군은 '역시 무능한 혼군이자 폭군에 불과했다' 라는 최종 결론이 돌고 돌아 원상태로 돌아왔다. 또 윤화백의 역사물에서는, 당대의 다른 학습 만화나 역사 만화 등에서는 채 인식하지도 못한 부분을 제대로 잡아내 그려낸 경우도 여럿 있다. 작가가 즐겨 그린 [[암행어사]] 만화에서는 암행어사의 온갖 [[현시창]]적인 부분을 꽤 세세하게 묘사했다. 1980년대의 암행어사 만화에 탐관오리들이 암행어사가 비리를 눈치 채지 못하게 별별 짓을 다 한다거나, 심지어 탐관오리가 먼저 암행어사를 제거하거나, 임지로 향하던 중 도적의 습격을 당하거나 [[호환(재해)|호환]]을 당했다거나 하는 장면까지 나온다.다만 현실에서 암행어사가 암행 중 사고를 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때 대중들이 생각하는 암행어사 이미지는 [[춘향전]]의 이몽룡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시절이다. 야사 위주라고 까이는 《[[맹꽁이 서당]]》에서도, 세종 시대는 국가 기틀 잡느라 완전한 태평성대는 아니었고, 성종 시절이 태평성대였다는 식으로 당시 사회상을 정확히 묘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맹꽁이 서당》의 표지'''에서도 작가가 분명히 '''조선 왕조 500년 [[야사(역사)|야사]]임을 분명히 표기해놓았다'''는 점이다. 이는 최초 《보물섬》 연재 당시에도 그랬다. '''그러니 이 작품들을 야사 위주라고 비판한다는 것은, 마치 소설을 놓고 허구를 써놓았다고 비판,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에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자료가 떡하니 나오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때문에 윤승운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이다. 같은 이유로 《[[고우영 삼국지]]》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다만 다른 것은 다 제치고도, 아직도 환단고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당장 링크된 인터뷰 항목에도 강단 사학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도 어느 정도 국수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자는 다소 안타까운 의견을 내비추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PRINT/784110.html|인터뷰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