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심덕 (문단 편집) === 생애 === [[조선총독부]]의 '관비유학생'으로 발탁[* [[도쿄예술대학|도쿄음악학교]]되어, '재학생명부'에 '특별유학생이라고 기재'되어 있음.], [[일본]]에서 성악을 공부[* 다만 원래 특기인 성악과가 아닌 갑종사범과(甲種師範科)에 재학[[도쿄예술대학|도쿄음악학교]] 재학생명부에 기록: 아무래도 음악과목 교사를 염두에 두고 사범과를 전공한 듯 하다. 여담으로 윤심덕의 여동생 윤성덕(1903~1968) 또한 언니와 비슷한 길을 걸어 [[이화여대|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유학생 시절[1921년]에, '동경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동우회의 조선순회공연에 참가'하여, <김영일의 사> 등 '연극 공연'에 앞서 '장미화,' '황혼의 시내' 등을 '독창'하였다. 이 시기, [[김우진]]과 처음 만나 '친교를 가진 것'으로 전해[* 후에, 동반 실종된 이후 김우진과의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소문으로 발전: 후술하겠지만, 김우진과 윤심덕의 주변인들 모두 이들이 연인관계가 아니라고 강력 주장.]진 이후, [[1923년]]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6월, 동아부인상회 3주년 창립 기념으로 열린 음악무도대회에서의 독창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성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성악가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었기에, 학교 음악선생, 극단 토월회 배우, 대중가요 활동 등을 하였다. 그리고 1926년 일본에 음반을 취입하기 위하여 갔고[* 여동생의 미국 유학을 위해서 돈을 모으고자 갔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사의 찬미]]를 취입한다. 이 곡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왈츠]]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주선율에 별도의 가사를 덧붙인 [[번안]]곡. 하지만 <사의 찬미>는 원래 녹음하고자 했던 곡이 아니었다. 노래를 녹음하던 중에 그녀가 갑자기 이 노래를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어마어마한, 1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어떻게 보자면, 그녀의 죽음이 판매량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노래는 죽음을 찬미하는 우울한 노래이고, 그 가수는 죽었으니... 아래에서 서술하겠지만, 그녀는 이 레코드판이 정식 발매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윤심덕이 취입한 음반은 위의 사의 찬미가 대표작이나 위 레코드판이 발매되기 6개월 전에 슈베르트의 들장미나 보리수 등을 월계꽃이나 옛꿈으로 번안한 곡을 녹음한 적이 있으며 해당 음반은 2022년 4월 말에 발견되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AhwOqUEJFoM|#]]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