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영하 (문단 편집) == 생애 == ||[[파일:attachment/윤영하/youngha1.jpg]]|| || 생도 시절의 윤영하 소령 || [[1973년]], [[경기도]] [[시흥군]](또는 [[인천광역시|인천시]])에서 [[예비역]] [[해군]] [[대위]] 윤두호(해사 18기)[* 윤두호 대위는 1970년 6월 29일, 공교롭게도 32년 뒤 아들이 전사한 날짜와 같은 날 [[북한 해군]]의 4t급 간첩선을 나포하여 무공 훈장을 받았다.[[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308010&ctg=10|기사]]]씨와 어머니 황덕희씨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자신의 아래로는 친동생 윤영민이 있다. 아버지는 해군 전역 후 해운 회사에 근무했는데 윤 소령은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때 3년 동안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국 생활의 영향으로 영어에 능통했었다고 한다. 귀국한 뒤 인천 소재의 모 중학교와 [[송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해군사관학교]] 50기로 졸업 및 해군 항해 [[소위]]로 임관하였다. [[운봉급 상륙함|계봉함]] 갑판사관, [[제118조기경보전대]] [[상황장교]], [[포항급 초계함|제천함]] 작전관으로 근무하였다. 1999년 [[인하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1월 [[참수리급 고속정|참수리]] 357호정의 [[정장#s=2|정장]]으로 부임하였다. 2002년 6월 29일 [[NLL]]을 넘어 남하, 도발한 [[조선인민군 해군|북한 해군]] 8전대 소속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과의 전투인 [[제2연평해전]]에서 전투 초반에 684호 선수에 장착된 85mm 전차포 초탄의 조타실 명중 이후, 파편상을 입었음에도 승조원들을 독려하며 지휘를 계속하던 개전 직후 승조원들에게 함교를 향한 적의 집중 사격을 포착해 포탄 파편에 맞은 상태로 '쏘란 말이야...!' 라는 명령을 거의 쓰러져가는 목소리로 내리고 다시 일어서서 지휘를 시작했으며,[* [[https://www.youtube.com/watch?v=g4jbysY_ISg&t=17s|실제로 타함에 승조중이던 중위가 윤 소령에게 무전받은 그대로 말투를 재현했다. 해당 영상 1분 8초부터.]]] 교전 개시 4분 후인 10시 30분경 "엎드려!" 라고 명령을 내린 그 순간, 참수리 357호정의 함교에 포탄이 한 발 명중해 폭음과 파편으로 357호의 함교가 아비규환이 된 틈을 타 그를 포착한 684호에 승조한 [[저격수]][* 북한 해군 서해함대는 '''제29해상저격여단 등지에서 특수교육을 받고 증원파견된 저격수를 함교에 배치하여 고속정 간 근접전 및 적함 지휘관 등의 인원들을 최우선 무력화하는 데에 응용'''한다. 결국 노천상태 함교에서 그대로 85mm 초탄 파편상을 입고 저격수에게 전사하고 만 것. 포탄에 전사했다면 관통공 및 구경 이모저모를 살펴볼 때, 당장 12.7mm만 가도 상하체가 분단되는 수준이라 상하체 분단 등의 극단적 외상흔적이 없었고 입관 전 윤두호 씨의 증언에 의하면 등 쪽에만 외상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저격수에 의한 전사 확률이 높다.]가 쏜 [[78식 저격보총]]에 등 쪽에 한 발을 저격당하고 심한 관통상을 입어 함교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뒤로 쓰러져 일자로 누운 상태로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결국 눈을 감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전사했다. 쓰러진 윤 소령을 본 당시 [[상병]] 박동혁 수병(의무장)이 [[심폐소생술]]과 지혈을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의료 조치를 한 박동혁 수병도 심한 중상으로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받다가 휴유증으로 숨졌다. 윤영하는 사후 [[대위]]에서 [[소령]]으로 1계급 추서,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수습된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게다가 연평해전 개봉 전에 그의 동기였던 이성민 소령과 1년 1기수 후배였던 이동진 소령이 나온 뉴스에서 윤영하 소령 자신이 해전에 출격하기 직전 해군사관학교 동기 기수들의 모임에서 가수 [[캔(가수)|캔]]이 불렀던 천상연을 부르곤 했는데,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 계속 그 노래만 불렀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윤영하 정장이 전사하자 참수리 357호정의 지휘권은 윤영하 대위의 부장이었던 [[이희완(군인)|이희완]] [[중위]]에게로 넘어갔으며 이희완 중위는 대리임무로 교전 중 오른쪽 다리를 통째로 잃었고 왼쪽 다리에 8cm 크기의 뼈 관통상을 당했다. 아홉 차례의 대수술 끝에 왼쪽 다리를 살렸지만 오른쪽 다리에는 의족을 채워야 했다. 한쪽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지휘해서 대한민국의 승리로 이끌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