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이상 (문단 편집) === 유럽에서 ===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기대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고, 1957년에 다시 [[독일|서독]]의 [[베를린|서베를린]]으로 옮겨 베를린 고등음악학교(현 베를린 예술대학 음악학부)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12음 기법, 작곡을 배웠다. 이 때 스승들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실링과 요제프 루퍼, 보리스 블라허가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1959년]]에 졸업한 직후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 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을 발표했고, 특히 후자는 현대음악 작곡가의 등용문으로 유명한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작품 출품은 하지 않았지만 [[1958년]]에도 참가했는데, 이 때 훗날 전위예술가이자 비디오 아티스트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백남준]]을 만나기도 했다.] 이 성공으로 귀국 계획을 보류하고 계속 서독에 남아 작곡 활동을 진행했고, 동아시아 음악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프라이부르크]]와 [[쾰른]]에 정주했다. 한편 1959년 그에게 접근한 동독 스파이 소녀에 의해서 [[북한]]과 접촉이 시작되었다. 그 소녀는 동독에는 많은 북한 사람들이 유학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했고, 윤이상은 통영과 [[일본]]에서 함께 음악을 공부했던 절친한 친구였던 음악가 최상한의 안부를 물어봤다. 최상한은 공산주의에 심취했고, 윤이상은 종종 그와 논쟁을 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전쟁 때 그는 월북했다. 이후 윤이상은 동독 및 북한과 접촉했고, 동베를린 대사관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북한 체제선전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쾰른 정주 시절인 1963년 4월, [[북한]]을 방문했다.[* 이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북한에서 윤이상은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콘트라베이스]]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친구 최상한을 만났다. 북한에서 윤이상은 강서고분에서 사신도 벽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영상' 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가 되기도 했다. 1964년 미국의 포드 재단에서 진행하는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 대상으로 선정되었고, 서베를린으로 이주했다. [[1966년]] 다름슈타트 음악제에 버금가는 현대음악제인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관현악 '예악' 이 초연되었고,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럽의 신예 현대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