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치호 (문단 편집) === 긍정론 === 1908년 발간된 찬미가(찬송가)[* 총 15곡이 수록됐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다수가 번역곡들이였으나 애국가와 가사가 거의 동일한 [[무궁화]] 곡 및 애국가 계열 3곡만 [[고유명사]]가 사용된 번역곡이 아니였다.]와 윤치호의 친필 애국가 뿐만 아니라 여러 증거가 있다. 일정 시기 소위 무궁화 곡[* 가사가 현 애국가와 거의 같다]이 수록된 창가집에서 윤치호 작사로 되어 있으며 [[조선총독부]]에 제출된 보고서에도 윤치호 작사로 되어 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05649040?sid=102|#]] 미국에서 발견된 무궁화 노래집을 보면 무궁화 곡의 작사자는 윤치호로 되어 있다.[* 무궁화 노래집에는 안창호의 '[[한반도]]가' 등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애국가 창작 열풍도 [[대한제국]] 시기 [[독립신문]]을 시작으로 있었고 이 결과물로 1902년 나온 것이 [[대한제국 애국가]]이다. 실제로 널리 퍼진 것은 대한제국 애국가 이전 창작된 곡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애국가는 그렇게 불린 곡 중에서 특히 유명했던 곡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역시 유명했던 1880년대 [[배재학당]] 버전 무궁화가 등은 [[황제]]나 [[황실]]을 찬양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었는데 [[공화주의]]를 천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게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정식으로 선택된다. 만약 정말로 윤치호가 쓴 것이라면 작곡을 한 안익태 역시 명백히 [[친일파]]로 분류된 인물이기 때문에 애국가라는 노래 자체가 친일파들이 합작으로 만든 노래가 되버리는 상황이니 논란이 있을 수 있어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작사자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로서는 [[긁어 부스럼]] 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광복]] 후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 조사 위원회'를 발족하여 사실상 윤치호라는걸 확인했으나 "작자 미상"이라 결론짓고 급히 조사를 마친바 있다. 당시 [[신문]]을 보면 정부에서는 친일파인 윤치호 작사로 결론 짓느니 차라리 미상으로 놔두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작사자로 안창호, [[최병헌]] 등은 자세한 언급조차 없었다. 1896년 배재학당 학생들이 최초로 가창한 이후 120여 년[* 심지어 이 때는 안익태의 작곡 대신 [[올드 랭 사인]]의 곡조와 윤치호의 가사만 있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비준을 받은 1940년으로부터 기나긴 세월 동안 친일파들의 창작물을 [[독립국]]의 국가로 사용했다는 것부터가 한국 [[국민]]들로서는 치욕일 수 밖에 없으며 국가 브랜드 [[이미지]]에도 치명적이다. 한국 정부가 인증한 시기만 따져도 사용 기한이 100년을 향해 달려가는 안익태ㆍ윤치호 애국가를 바꾸는 사안도 전혀 간단치 않은 문제인데 윤치호는 정부가 공인하고 [[낙인]]을 찍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윤치호의 작사를 정부가 인정해버리면 필연적으로 애국가 교체 논란이 불거질 수 밖에 없다. 새로운 가사의 공모 비용과 보급, 국민들을 향한 재교육, 새 작사가의 사상 검증 건도 만만치 않으며 접수받은 신[[버전]] 애국가 중 특정 하나를 국민들로부터 동의를 얻는 것도 너무나 고단한 일이다.[* 주소지를 바꾸는 [[도로명주소/비판|도로명주소]] 하나만으로도 2014년 시행 후 6년이 지난 2020년까지도 진통을 앓고 있는 것이 현 [[대한민국]]이다. 하물며 국가의 작사가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의 공표와 교체는 [[후폭풍]]이 어느 정도나 될지 가늠조차 힘들다.] 이는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미 광복한 직후 1950년대부터 나오던 논란인데 당시에도 있었던 논란을 반 세기가 넘게 지난 오늘날까지도 아직도 덮으려고만 하는 것은 이러한 속사정이 있던 것이다.[* 한편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논란에 3.1 운동이 태극기, 선언서, 애국가로 시작했으니 작사자는 문제될 것 없다고 발언했다.] 그래서 정부, 학계의 주류 [[사학자]]들, 근현대 역사 관련 [[시민단체]]들도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고 애국가의 작사자를 '미상'으로 남겨둔 채 조용히 넘어가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