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치호/생애 (문단 편집) ==== 백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 ==== 당시대 대부분의 한중일 미국 유학 출신자들의 공통점이지만, 윤치호도 미국 유학파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나 [[무츠 무네미츠]]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입지와는 전혀 달리 [[대영제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앵글로색슨족]]을 깊이 증오했다. 당연히 유학 과정에 받은 황인종에 대한 많은 백인들의 인종 차별이 근원이었다. 윤치호 일기에는 그가 상하이의 공원 입구에서 봤던 푯말 '중국인(황인종)과 개는 출입 금지'의 기억이 자주 거론되며, 유학 시절에 겪은 백인 남성의 발차기 등 신체적 폭력의 경험이 암시된다. 그래서 그의 일기 전반에는 백인들에 대한 깊은 분노가 자주 표출된다. 이러한 백인들의 인종차별 및 침략, 착취에 대응하기 위해 같은 황인종인 일본과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연대,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일본에 동조하였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을때는 일본의 '우리식 아시아주의'인 대동아 공영권에 전폭적 지지를 보낸다. (예: 영미는 앵글로색슨의 저주받은 식민 통치 기구들을 가지고 지옥으로나 떨어져라. 일본에게 신의 축복을!)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한 증오와 멸시, 또한 일본의 조선인들에 대한 정책적 차별에 대한 분노(예 : 만주 군관 학교의 합격자률이 일본인 70% 조선인 30%였는데, 만주인 입학생이 늘어나자 일본인 입학 상한선은 그대로 놔두고 조선인 합격선을 20%로 줄였다. 치졸한 섬 야만족들이여)를 일기에 표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의 의식에 모순이 많은 이유는 순전히 그의 백인들에 의한 차별 대우, 멸시에 대한 원한, 약육강식적 사고에서 기인한다. 즉 '일본이 이길 것이기에 일본을 지지한다'가 아닌, '백인에게 이겼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에 그나마 당시에 가장 국력이 셌던 황인종인 일본을 지지했다'가 맞은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윤치호의 모습은 똑같이 미국 유학파 출신이었지만 아예 결혼도 백인 여성과 하고 백인종들에 대하여 비교적 큰 피해의식을 가지지 않았던 [[이승만]]과 [[필립 제이슨]]과는 크게 비교되는 모습이라고 평가 할 수 있겠다. 이승만은 미국의 인종차별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면서도 독실한 개신교인답게 모든 인종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기독교적 관념을 견지하였고, 정치력, 학벌, 인맥 등 여러 수단을 통해 미국 내에서 한국인의 입지를 높이는데 주력했다. 제이슨은 본인의 체력과[* 일단 키가 177.8cm로(그의 미국 여권에 신장이 5피트 10인치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 당시 미국인 남자 평균 키는 173이었다.) 조선 말기 조선인으로서는 유달리 키가 컸고, 갑신정변 당시 직접 칼 들고 호위를 맡았을 정도로 무예에 조예가 있었던 사람이다. 미국에서 미국인 여성인 뮤리엘과 결혼하게 된 것도 그녀의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을적에 불량배로부터 그녀를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서였다.] 의지력으로 차별을 어느 정도 이겨냈다. 하지만 윤치호는 제이슨과는 달리 체력적으로 문약(文弱)했던 면이 있어 인종차별로 인한 수치심과 증오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면화한데다가, 이승만과는 달리 완전한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염세주의자이자 사회진화론자로서의 모습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그나마 같은 황인종의 국가인 일본에 붙기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