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택영 (문단 편집) === 초기 === [[한성부]]에서 [[조선]] [[선조(조선)|선조]] 때의 정승이었던 [[윤두수]]의 후손인 영돈령부사로 추증된 [[윤철구]]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평 윤씨]] 족보에 따르면 큰형 윤시영은 친척의 양자로 갔다. 그래서 사실상 둘째이며 세간에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1899년 시강원 시종관에 임명된 것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비서원승, 영친왕부령 겸 [[혜민원]] 총무, 영친왕부 총판, 법무협판, 지돈령사사, 육군 참장·부장·찬모관을 역임했다. 1904년 4월에는 경제연구회 총재로 활동한 뒤 7월에는 광부구제회를 조직했다. 1904년 [[순명효황후|황태자비 민씨]]가 사망하자, 2년 뒤 1906년 당시 12세 된 [[순정효황후|큰딸]]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과 결혼시켜 황실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윤택영은 친일보다는 항일에 가까웠다.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기 위해 헤이그에 가려고 하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가는 것이 대한제국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가지않기로 마음먹었다.[[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kifr.d_0004_0290_0010#self|#]] 1907년 순종 즉위 후 딸이 황후가 되자 황제의 장인 자격으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작호는 본관인 '해평(海平)'에서 유래했다. 조선의 [[부원군]] 작호는 대부분 거의 본인의 본관에서 따왔다.] 1908년 1월에는 기호흥학회 찬무부 특별주무원, 10월에 특별찬성회원을 맡았으며, 같은 해 2월에는 대동학회 회원, 9월에 상공근무사 찬성장, 그리고 10월에 일본적십자사 특별위원과 11월에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을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