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택영 (문단 편집) === 채무왕 === 앞서 짧게 언급했지만, 윤택영은 [[빚]]이 많았다. 황실과 연을 맺으려 꾸었던 빚을 안갚는 것은 물론, 오히려 [[부원군]] 지위를 이용해 더 막대한 빚을 지면서까지 [[사치]]와 [[유흥]]을 즐겼다. 이로 인해 생긴 별명이 ''''채무왕'''', ''''차금대왕(借金大王)''''[* 차금(借金)은 돈(金)을 빌린다(借)는 뜻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장인을 저런 꼴로 방치하는 게 [[황실]]의 체면에도 손상이 가고 해서 1907년에 윤택영이 당시 진 채무의 절반 금액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특별히 내주었다. 그러나 그 걸로도 부족했는지 여러 차례 사위 [[순종(대한제국)|순종]]을 찾아가 자기 빚 좀 대신 갚아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어서 나중에는 순종이 거절했다. 그래도 믿을 건 피붙이라고 친형 [[윤덕영]]에게 돈 좀 꿔달라고 했으나 윤덕영도 동생에게 떼먹힌 돈이 꽤 있었기에 바로 거절했다. 그러자 서울 시내 한복판 [[요릿집]]에서 주먹다짐까지 했다.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잡담’에 관련 이야기가 나와있다. >'일전에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윤덕영|그의 형]] '대갈 대감'과 '''대가리가 터지게 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참고로 '대갈대감'은 윤덕영의 별명으로 몸집에 비해 [[큰 머리|머리가 지나치게 커서]]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심지어 [[일본 정부]]에게까지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요구했을 정도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경술국치|한일합방]] 당시 받은 어마어마한 금액의 은사금은 어쨌냐고? 그걸로 빚갚긴 했는데 다시 사치스런 소비생활을 하다가 또 채무를 졌다. 하도 돈을 안 갚아서, 보다못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윤택영의 재산을 저당잡고 조사에 들어갔는데, 그 때 혹시나 해서 다른 [[친일파]] [[조선귀족|귀족]]들도 조사해보니 역시나 빚에 시달려 궁핍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실 이들 친일파 귀족들이 600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받긴 했지만, 문제는 그 형태가 '''50년 만기 채권'''이었기 때문에 실제 은사금은 일본은행에서 보관했고 그 이자만 받아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의외로 이들 조선귀족의 재산 증식에 은사금이 별 도움이 못 되었다고 한다. 50년 뒤에 받는다고 해도 그 동안 인플레이션 생각하면 실제 가치는 훨씬 낮아져 있을게 뻔하고, '''무엇보다 일제가 35년만에 망해버렸기 때문에...'''] 결국 일본 의회에서 명색이 일본의 귀족이 궁핍하게 살아서 되겠냐는 소리에 [[조선총독부]]에 특별예산을 편성해 [[귀족]]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귀족|조선 귀족]]들에게 얼마 안되는 보조금은 새발의 피일 뿐이었고 금방 또 날렸다. 그래서 일본 측에서는 이를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고 결국 윤택영은 작위 박탈까지 당했다가 나중에 겨우 회복했다. || [[파일:2018-03-14 18-52-36.jpg|width=100%]] || || 1920년 7월 11일 출국한 윤택영 부자 관련 동아일보 기사. || 결국 [[이자]]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도저히 감당 못 할 수준이 되자 해외로 도피할 생각을 하고 1920년 7월 11일 장남 윤홍섭과 함께 [[중화민국|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채무자들에게는 예전에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가 [[위안스카이]]에게 빌려준 10만환이 있는데 그것을 받아 빚을 갚겠다고 말하고 갔다. 그래서 빚쟁이들이 안심하고 있었는데 한 달 간 있다가 온다 해놓고도 돌아오지 않자 그제서야 눈치를 챘다고 한다. 그러나 빚을 잔뜩 지면서까지 호화롭게 살았던 몸이라 [[외국]]에서의 낯설고 초라한 생활에 적응할 리 없었고, 툭하면 [[순정효황후|딸]]과 [[순종(대한제국)|사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귀국할 수 있도록 빚 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고 졸라댔다. 그러다가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그래도 [[장인어른|장인]] 겸 [[신하]]라고 [[문상]]은 해야 한다며 몰래 [[조선]]에 왔다가 윤택영이 문상을 위해 올 걸 예상하고 [[창덕궁]] 주위를 감시하던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빚 독촉을 해댔다. 위에서 언급한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잡담’에 실린 관련 내용이다. >부채왕(負債王) 윤택영 후작은 국상 중에 귀국하면 아주 채귀(債鬼 · 빚귀신)의 독촉이 없을 줄로 안심하고 왔더니 각 채귀들이 사정도 보지않고 벌떼같이 나타나서 소송을 제기하므로 재판소 호출에 눈코 뜰 새가 없는 터인데, 그렇게 싸우지 말고 국상 핑계 삼아 아주 '''자결이나 하였으면 충신 칭호나 듣지.''' 이를 견디지 못한 윤택영은 상이 끝나자마자 다시 [[중화민국|중국]]으로 부리나케 도망쳤다가 결국 [[객사]]하고 말았다. [각주] [[분류:조선의 국구]][[분류:대한제국의 부원군]][[분류:조선귀족 후작]][[분류:대한민국의 객사한 인물]][[분류:1876년 출생]][[분류:1935년 사망]][[분류:해평 윤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