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학길 (문단 편집) === [[최동원]]과의 비교 === 면면히 살펴보면 통산 기록, 92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업적 등 [[최동원]]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면모를 가지고 있다. 장기간의 팀 기여도 측면에서는 오히려 최동원을 능가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 통산 WAR는 최동원이 윤학길보다 조금 더 높긴 하지만.[* 다만 부상도 거의 없이 12시즌을 뛴 윤학길과 다르게 최동원은 8년 선수생활을 하면서 그마저도 막판 3년(롯데 1년,삼성 2년)은 부상과 계약문제로 거의 뛰지 못했음에도 거둔 성적이라 평가는 최동원이 압도적으로 높긴 하다.] FIP 랭킹으로 봤을 때 통산 FIP가 500이닝 기준 15위, 1,000이닝 기준 8위, 1,500이닝 기준 3위다. ERA 랭킹은 그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수비의 도움을 별로 받지 못했지만, 투수 자체의 실력은 굉장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FIP+ 랭킹도 상위권. 그렇다고 [[최동원]]보다 높다는 얘기는 아니다. 최동원의 FIP은 500이닝 기준으로도 3위. [[최동원]]과 비교될 때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한국시리즈 우승 과정인데, [[1984년 한국시리즈|1984년 우승]]을 최동원 거의 [[원맨쇼|혼자서 책임지다 시피]]했다면 [[1992년 한국시리즈|1992년 우승]]은 윤학길과 [[염종석]], [[박동희(야구선수)|박동희]] 세 명이서 골고루 나눠서 책임졌기 때문이다. 전력상의 열세를 딛고 팀을 우승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최고의 선수이자 팀의 상징이던 [[최동원]]은 롯데에 몸담던 6년간 리그 극상위권의 투수로 군림하며, 길진 못했어도 강렬한 기여와 기록, 기억을 남겼다. [[윤학길]]은 이러한 최동원의 뒤를 이은 선수로 최동원이 팀을 떠난 후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았다. 최동원만큼 강렬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리그 상위권의 활약을 보이며 약팀이었던 롯데를 지탱하였으며, 최동원과 임팩트면에서 차이는 있었지만[* 수치상으로 최동원의 6년간의 기여가 윤학길의 12년간의 그것과 비슷하다. 물론 두 수치 모두 영구결번급이다.] 통산 100완투와 6번의 200이닝 소화가 보여주듯 팀을 위한 헌신과 투혼에 있어서 맥을 같이 했다. 하지만 1984년과 92년 한국시리즈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84년의 경우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우승팀이 바로 7전 4선승제로 맞붙게 되어있다. 즉 한국시리즈 7경기가 포스트시즌의 전부라는 얘기다. 게다가 당시에는 정규리그가 끝나고 무려 한 달 이상의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한국시리즈가 시작되었다. 반면 92년의 경우 시즌 종료와 함께 시작된 포스트시즌에서 롯데는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단계적으로 올라오며 포스트시즌을 치뤘다. 때문에 92년의 경우 84년과 같이 단 한 사람의 활약만으로 우승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92년의 경우 최동원처럼 하루 걸러서 등판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력 투수들은 두 경기 정도 휴식 후 등판하는 경우가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