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한봉 (문단 편집) === 학생운동가 시절 === 1948년 2월 1일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 벽송마을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1989071700501|674번지]][* 이 지번의 필지는 [[https://theme.archives.go.kr/next/acreage/viewCadastreDetail.do?packid=0000230549&docid=0008204321&mngno=BJCA485494&type=12&want=1|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5년 당시 윤한봉의 조부 윤재철(尹在喆, 1891. 2. 16 ~ 1943. 2. 12)의 소유였다.]에서 아버지 윤옥현(尹玉鉉, 1916. 6. 2 ~ 1975. 2. 6)과 어머니 [[청주 김씨]](1916. 5. 29 ~ 2014. 4. 4)[* 김의석(金義錫)의 딸이다.] 사이에서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http://press.cnumedia.com/news/articleView.html?idxno=14489|태어났다]]. 아버지 윤옥현은 강진군 지역의 유지로 1952년 5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제7대 칠량면장, 1954년부터 1958년 3월까지 제9·10대 칠량면장 등 3대에 걸쳐 칠량면장을 역임하고 칠량면 청년단장 및 소방대장 등을 [[http://www.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2669|지냈다]]. 윤한봉은 강진 칠량국민학교와 [[조선대학교 부속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인제군]] [[북면(인제)|북면]] [[원통#s-3|원통리]]에 주둔하던 [[제12보병사단]] [[제52보병여단|제52보병연대]]에서 병역을 마쳤다. 군 복무 중 [[김신조]] 일당이 저지른 [[1.21 사태]]로 복무기간이 6개월 연장되어 총 3년 6개월간 복무했다. 만기전역 후 1971년 3월 늦은 나이에 [[전남대학교/학부 및 대학원/농업생명과학대학|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입학 후 학업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날 윤한봉은 광주제일고등학교 출신들이 전남대학교에 설립한 이념서클 민족사회연구소가 주도한 '학원 병영화 반대' 시위를 우연히 목격하였다. 이들은 윤한봉과 같은 71학번으로 광주제일고등학교 이념서클 '광랑' 출신들이었다. 해당 시위를 주도했던 [[정상용]], 이양현 등은 시위 직후 강제징집되었지만 윤한봉은 이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윤한봉은 1972년 [[10월 유신]]이 발표된 직후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특유의 리더십을 통해 빠르게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을 장악해나갔다. 특히 신뢰하던 지인 민상홍을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하여 승리를 일구었다. 윤한봉은 이를 바탕으로 민족사회연구소의 후신 교양독서회와 농과대학 학생회를 통해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을 주도했다.[[https://brunch.co.kr/@1980may18/36|#]] 전남대학교 4학년 재학 중이던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다. 윤한봉은 자신을 찾아온 광주제일고등학교 출신 나병식의 설득으로 전국 동시 다발 시위를 준비하던 민청학련에 합류했다. 나병식은 첫 집단적 반유신 시위였던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 시위 주동자였다. 나병식은 훗날 풀빛출판사를 설립하였고,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담은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출판한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윤한봉은 민청학련 호남권 총책을 맡았으며 전남대학교 활동가 김정길, 이강, 김상윤 등과 함께 반유신 시위를 준비했다. 민청학련은 반유신 시위를 전국 각지에서 다발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의조직으로, 강령을 비롯한 조직의 틀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청학련은 전국 동시 다발 시위를 일으키기도 전에 [[중앙정보부]]에 발각되었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 공산불법단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의 조종을 받아,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 국가주요기관을 점거, 정권을 인수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대학생들이 각 학교에서 동시에 시위를 일으키는 정도로 어떻게 정권을 인수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의문이다. 긴급조치 4호 발표로 조직이 노출되자, 윤한봉은 광주지역 학생운동가들을 집결시킨 후 "박정희가 권고한 자수기간이 지나는 4월 9일 자로 시위를 감행하자"고 주장했고, 4월 9일 전남대학교에서 반유신 시위를 주동하던 중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당시 전남대학교 재학생 18명이 체포되었으며, 윤한봉, 이강, 김정길, 김상윤은 육군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https://brunch.co.kr/@1980may18/3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