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형배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남일초등학교, [[부산대신중학교]], [[경남고등학교 야구부|경남고등학교]], [[경성대학교 야구부|경성대학교]](1987학번)를 졸업하고 1991년 지명을 받지 못해 [[롯데 자이언츠]]에 [[육성선수|신고선수]]로 입단하였다. 1992년 [[윤학길]], [[염종석]], [[박동희(야구선수)|박동희]] 등 3명의 에이스를 잇는 네 번째 투수로 활약하며 8승을 올렸고 [[1992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8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강병철]] 감독이 윤형배를 2차전 선발로 등판시키자 윤형배 본인도 "이게 뭐지?" 싶었다고 한다. 사실은 당시 롯데는 [[KBO 준플레이오프/1992년|준플레이오프]]부터 가을야구의 대장정을 이어왔기에 선발진이 심하게 지쳐있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올린 선발투수가 윤형배였다. 어차피 1차전을 이겼고 한국시리즈 원정 경기는 1승 1패만 해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는 경향이 많았던데다 강병철 감독은 이겨야 할 경기와 버려야 할 경기를 구분하는 성향이 뚜렷했기에 이날 윤형배의 선발 등판은 '버리는 카드' 성격이 강했다. 심지어 윤형배 본인도 "아, 오늘은 팀에서도 나한테 큰 기대를 안 하는가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그런 경기에서 덜컥 8이닝 무실점 호투를 하고 팀이 무려 2연승을 해버렸으니 팀 분위기의 상승세는 정점에 다다랐다. 물론 이 승리 덕에 [[한화 이글스/사건사고#1992년 한국시리즈 2차전 관중 난동 사건|빙그레 선수단 버스는 박살이 났다.]]] 롯데의 V2에 공헌하였다.[* 뒤이어 3차전 에이스 [[윤학길]]을 투입하고 역전패를 당했던걸 생각하면 2번째 경기에 이겼던 건 신의 한수였다.] 1993년에는 [[평균자책점]] 2.46에 14승 9패 3세이브를 기록하며 부상으로 시달리던 [[염종석]]을 능가하는 성적을 올리며 롯데의 에이스로 등극, 커리어 하이를 달성. 특히 이 시즌에 [[빙그레 이글스]]의 [[노장진]][* [[공주고등학교 야구부|공주고]] 3학년 에이스 투수로 1992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선린상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과 대결을 벌여 1:0 완봉승을 이끌어 냈던 경기는 롯데 올드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노장진은 알려진 대로 선수 생활을 제대로 지속하지 못했고 윤형배 역시 1994년부터 부진하면서 명승부로 회자되지는 못 하고 있다. 1994년부터 방위 복무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좋았던 폼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몸관리에 실패하면서 갑자기 살이 쪘는데 이후 구위와 제구력이 모두 하락한다. 당시 방위병은 홈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지만 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6.49의 [[평균자책점]]에 승리없이 3패만 기록했다. 방위 복무를 마치고 난 1995년에는 [[윤학길]], [[주형광]], [[강상수]], [[염종석]]에 이은 팀의 5선발로 활약하면서 완투 2차례 포함 5승을 거두며 부활의 조짐을 보이나 싶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6년 단 1승에 그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1997년 6월 27일 [[쌍방울 레이더스]]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1999 시즌을 마치고 조용히 은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