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은고부인 (문단 편집) == 의문점 == 《삼국사기》에서는 '대부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나, [[소정방]]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문>에도 ''''안으로는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으니 형벌이 미치는 곳은 오직 충량에 있었다''''라는 기록이 전하며 《[[일본서기]]》의 다른 부분인 <제명기> 6년 7월조에 보면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하시카시(대부인, 大夫人)가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횡탈하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를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자초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인이 쓴 대당평백제국비문은 백제를 적으로서 멸망시킨 관점이므로 백제가 망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멸망 과정을 왜곡할 수도 있지만, 당시 백제와 우호 관계였던 일본이 비슷한 기록을 남겼으니, 두 나라의 기록이 [[교차검증]]된다. 즉 백제 멸망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에 이 '대부인(=요사스러운 부인)'의 존재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걸로 보인다. 이 대부인은 의자왕 후기에 파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데 흥미로운 것은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일찌감치 [[장남]] [[부여융]]을 태자로 세운 바 있었으나 650년대 말에 갑자기 태자를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교체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성충과 흥수 등의 신료들을 내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본다면 대부인이 '''자신의 아들인 부여효를 태자로 세웠으며''' 이 과정에서 반발한 [[성충(백제)|성충]]과 [[흥수]] 등의 신료들을 내치는데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과연 은고 = 대부인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왕건]]도 그렇듯 왕의 부인이 두 명 이상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일본서기》에서 은고를 의자왕의 '''[[처]]'''라고 기록한 걸로 보면 은고는 의자왕의 [[후궁]]이 아니라 정실 [[왕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至庚申年七月。百濟遣使奏言。大唐。新羅幷力伐我 旣以義慈王。々[* 々는 앞 글자의 반복이란 뜻이니 王.]后。太子爲虜而去 >경신년 7월에 이르러 백제가 사자를 보내, 당과 신라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여 이미 의자왕, 왕후, 태자를 포로로 하여 갔다고 아뢰었다. >- 《일본서기》 <[[사이메이 덴노|제명 천황]]> 6년, 660 의자왕과 같이 잡혀간 의자왕의 처는 은고밖에 없으니 은고가 의자왕의 왕후가 된다. '후(后)'라는 글자는 왕의 부인들 중 '정실 부인'을 나타내는 의미다. 《한서》 <왕망전>에 따르면 '대부인(大夫人)'은 정실 부인, 그것도 '태자를 둔 부인'을 말한다. 의자왕의 정실 부인은 은고이니까 대부인(大夫人), 즉 임금의 대부인은 은고가 된다. 거기에다 대부인은 태자를 두었다는 뜻도 포함되었으니 은고는 태자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부여효가 은고의 소생이고, 은고가 바로 대부인으로서 백제 멸망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은고가 과연 백제 멸망에 기여한 대부인과 동일시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일본서기》가 은고에 대해서 별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되는데 만약 '은고 = 대부인'이 성립된다면 은고가 잡혀가는 부분에 대해서 뭔가 평을 내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은고에 대해서는 그저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전부다. 그리고 대부인을 중국에서 태자의 모친이라는 의미로 썼다고 해서 백제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은고 = 대부인'이 성립하지만 《일본서기》나 <대당평백제국비문>에 기록된 대로 그녀가 과연 [[요녀]]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흔히 의자왕이 즉위하고, 이듬해인 642년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보나 이에는 이론이 있다. 학자들은 이 친위 쿠데타의 발생 시점이 의자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642년이 아니라 '''의자왕 15년인 655년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가 기록된 시점이 《일본서기》에서는 642년 [[고교쿠 덴노]]의 등극 시점으로 되어있으나, 고교쿠 덴노는 잠시 물러났다가 655년에 다시 [[사이메이 덴노]]라는 이름으로 재즉위하는데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이를 혼동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의자왕 15년 이전과 이후의 기록에 차이가 보인다. 의자왕 15년 이전에는 성군의 모습이던 의자왕이 15년 이후로는 ~~놀자판~~ 독선적인 폭군의 모습으로 돌변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은고는 의자왕의 친위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의자왕이 655년[* 기록에는 642년이라고도 하는데 '''정황상 655년의 일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 정설이다'''.] [[무왕(백제)|무왕]]의 부인인 태후가 죽은 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태자가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교체되었으며, 그 전까지 집권 세력이었던 좌평 성충, 흥수 등이 내쳐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군대부인이 요녀라고 기록된 것은 고대 동북아의 관습상 왕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왕을 감히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못해서 왕 본인 대신 왕의 정치를 뒷받침하는 세력들을 소인배, 요망한 것들로 비난하는 것이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의자왕이 기존의 귀족 세력들을 내치면서 은고를 위시로 신진 세력들을 친위 세력으로 삼아 왕권을 강화했지만 이 과정에서 은고 세력이 기존 귀족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기존 귀족들이 은고를 요망한 대부인으로 폄하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