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은언군 (문단 편집) === 출생 === 1754년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궁녀 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는 궁녀를 건드린 걸로도 모자라 임신까지 시켰다는 사실을 들켜 [[영조]]에게 혼날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심지어 임씨의 아이를 낙태시키려고까지 해서 보다 못한 '''세자의 정실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임씨가 불쌍해서 도와줬다고 한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한 달이 넘게 사도세자를 꾸중했고, 《[[한중록]]》에 의하면 혜경궁까지 질책을 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너는 여자가 되어 가지고 [[질투|투기]]도 안 하느냐?', '네가 남편(사도세자)의 편을 들면서 불충까지 저지르고 있다' 따위였다. 이것이 혜경궁이 평생 딱 한 번 들어본 영조의 꾸지람이다.[* 조선시대에서 여자의 투기는 [[칠거지악]] 중 하나로 문제시했지만 투기를 안 하는 것도 역시 문제로 여겼다. --어쩌라는거야-- [[성종(조선)|성종]]이 [[폐비 윤씨]]를 처음 왕비 자리에서 폐하려고 할 때 [[임사홍(조선)|임사홍]]이 "옛 부인들 중 투기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라고 설득하여 성종도 뜻을 거둔 걸 보면, 투기는 악덕이 맞지만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본능-- 일로 보았고 때문에 아내가 아예 투기를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본 듯하다.] 영조는 학문을 가까이 해야 할 20세의 젊은 세자가 궁녀에게서 왕손을 본 점과, 혜경궁과의 사이에서도 이미 두 명의 아들을 낳았음에도 궁녀를 건드려 자식을 낳은 것을 굉장히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도세자는 은언군 이후에도 [[숙빈 임씨]]에게서 [[은신군]], 그리고 [[경빈 박씨(장조)|경빈 박씨]]에게서 [[청근옹주]]와 [[은전군]]을 얻어 더욱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영조는 혜경궁 소생의 적손들에 비해 후궁 소생인 서손들을 비교적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손주들의 생모들이 하나같이 다 양반가 규수 출신인 간택 후궁이 아닌 신분이 미천했던 [[궁녀]]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왕세자가 굳이 궁녀에게 승은을 내린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방탕한 행실에 대해서도 영조는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면 참작받을 여지라도 있었겠지만, 이미 세손(훗날의 [[정조(조선)|정조]])이 태어나 후계구도도 든든해진지 오래였던지라 그것도 아니었다. 설령 혜경궁 홍씨가 적자녀를 낳지 못했더라도 배경이 번듯한 생모에게서 세손이 태어날 수 있도록 양반가 출신의 간택 후궁을 들이는 게 정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