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은언군 (문단 편집) === 왕자군 책봉 === 아버지 [[사도세자]]가 [[임오화변]] 때 사망한후 출궁되어 자라다가 10살 때 은언군에 봉해졌으며, 3년 후 송낙휴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항렬상 외조부인 [[홍봉한]]에게 생활비를 지원받았는데 [[김귀주]]한테 이를 탄핵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순회세자]]의 집이었던 [[용동궁]]을 사저로 하사받고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28448&cid=40942&categoryId=31748|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1771년 외람되게 근수[* 관원의 시중을 드는 노비.]를 많이 거느리고 [[https://ko.dict.naver.com/#/entry/koko/2badae7a4eaa4f58a24bcd2cf1d29b0a|남여]]를 타고 다닌다 하여 동복 동생 [[은신군]]과 함께 [[사치]]를 부린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말았고, 나중에는 동복 동생 은신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된다.[* 진짜 이유는 빚을 졌는데 갚지 않았던 이유이다. 은신군의 보모인 황덕혜의 남동생 황경룡이 내시들과 결탁해 시전 상인들의 재물을 탈취한 죄목이 고발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가 시전 상인들에게 수백냥의 빚을 지었는데 갚지 않았던 것이 들통났다. 나중에 영조가 이를 알게 되어 그의 분노를 사서 귀양을 가게 되었던 것.] 그 곳에서 은신군이 죽자 그 덕에(?) 유배간 지 3년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풀려나서 한성으로 돌아와 한동안 학문에 주력하면서 살았다. 이복형 [[정조(조선)|정조]]가 즉위했을때는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28448&cid=40942&categoryId=31748|오위도총부]] 도총관에 복직했고 종친에게 주어지는 최고 품계인 홍록대부(興祿大夫)에 오르며 나중에는 현록대부(顯祿大夫)에도 오른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죄인 신분으로 죽어서 추존되지 못한데다 이복형 정조가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무품이 되지 못했다.] 이때 은언군은 [[혜경궁 홍씨]]의 생일을 챙기고 생일날 벌어지는 잔치를 주관하기도 했다. 다만 은언군은 그의 집에서 소를 밀도살하여 파는 물의를 일으켰고 대신들이 이를 탄핵했으나 정조의 비호로 무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