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밀대 (문단 편집) === 강주룡 을밀대 농성 사건 ===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4090301183_0.jpg]] (을밀대 지붕에서 농성 중인 강주룡 열사 사진.) 한편, 을밀대는 한국 노동운동사에서도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데, 바로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5월 29일에 강주룡 열사(1901~1932)가 을밀대 지붕에 올라 단식농성을 한 사건이 유명하다. 당시 [[평양부]] 고무공장의 노동자였던 강주룡 열사는 1930년에 고무공장 사측의 일방적인 임금[* 당시 약 130~140원.] 10% 삭감에 반발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 사측, 일제 경찰이 폭력적인 방식[* 사측의 대체인력 투입과 용역깡패에 의한 폭력, 경찰의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메카시즘|공산주의자]] [[종북몰이|낙]][[색깔론|인]] 및 노조 지도부 구속 등.]으로 탄압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을밀대 지붕에 올라 단식농성을 벌였으며, 이는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05300020920201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05-30&officeId=00020&pageNo=2&printNo=3744&publishType=00020|당시 농성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당시 강주룡 열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끝까지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명예롭게 죽을 것이며,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으려 한다"'''라 밝히는가 하면, 농성 8시간 만에 경찰에 의하여 강제구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옥중에서도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목숨을 내걸은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투쟁 끝에 강주룡 열사는 비록 해고노동자가 되었지만 고무공장의 임금삭감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후 강주룡 열사는 잦은 단식투쟁으로 인하여 몸이 쇠약해져 몇 년 못 가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