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사조약 (문단 편집) === 아니다 === 그러나 이는 을사조약 체결 과정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할 수 없는 주장이다. 조약 체결 당시 고종은 일제의 군사적 위협 속에 지속적으로 체결을 강요받았지만 갖은 압력에도 꿋꿋이 을사조약에 반대했다. 어전회의에서 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이토가 알현을 청하자 거부하기 위해 인후염을 핑계로 자리를 떠났을 뿐 아니라 회의를 중지시키기 위해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어전회의에 보냈는데 이재극이 도중에 일본군에게 감금당하고 박제순이 도장을 찍으면서 늑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일본은 을사조약이 고종의 지시 하에 공정했다는 논리를 펴기 위해 체결 당시 없었던 고종을 그림에 넣었다. 또 윌라드 스트레이트는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에 동의했던 루스벨트 정부의 인물이자 조약 체결 당시 참관하지도 않았는데 고종이 을사조약을 체결하라고 지시했다는 말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미국의 외교적 이득에 따라 을사오적과 일본 측의 주장을 그대로 발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고종은 끝까지 조약 체결에 반대했기 때문에 문서에 찍힌 도장은 고종의 옥새가 없고 박제순의 도장뿐이다. 무엇보다 고종은 각국에 '본인은 동의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무력시위와 협박으로 부당한 조약임'을 밝히는 친서를 각국에 전달했고 '''[[헤이그 특사]]'''를 보내 일제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헐버트를 보내 그의 주장을 강조하려고 하였다. 위에서 보듯 을사오적 외에 반대한 3명 중 한규설만 제외하고는 '''모두(이하영, 민영기)가 변절했으며''' 이재극도 조약 체결 후 궁내 대신으로 고종을 협박한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