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사조약 (문단 편집) == 이완용의 변명 == 1905년 12월 16일 사실상 온 조선의 공적이 되어 버린 을사오적이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를 찾아가 변명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이완용의 주장이다.[* 하지만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의 관리하에 만들어 졌으므로 그걸 감안해서 보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도 1863년, 그러니까 철종 실록까지만이다.](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삼가 생각건대, 신들이 성조(聖朝, 왕조)에 죄를 짓고 공손히 천토(天討, 하늘의 꾸짖음)를 기다린 날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황상(皇上)께서 특별히 더 관대하게 우선 폐하의 위엄을 늦춘 것은 참으로 하해(河海)와 같은 도량으로 너그럽게 포용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들이 버젓이 묘당(廟堂, 의정부(내각))에 있는 것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국(時局)을 보건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요즘 상소들을 보았는데 거기에서 탄핵(彈劾)하고 논열(論列)한 것들은 신들이 스스로 폄하(貶下)한 것과 크게 다르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은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宗社)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민(人民)들은 노예로 되고 강토는 영지(領地)로 되었다고 인정하는데 이렇듯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저 무리들이 과연 새 조약의 주지(主旨, 주된 뜻)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것이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 흐리멍덩하게 하는 말이니 상대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철저하게 힘껏 해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조약의 주지로 말하면, 독립(獨立)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帝國)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皇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 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일 뿐입니다.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들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義擧)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중대한 문제가 이미 결판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갑자기 후회하면서 스스로 새 조약을 파기하고 옛날의 권리를 만회하겠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국교 문제에서 감정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조약 체결의 전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일본 대사(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에 올 때에 아이들과 어리석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중대한 문제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연 11월 15일 두 번째로 폐하를 만나본 뒤에 심상치 않은 문제를 제출하니, 폐하께서는 즉시 윤허하지 않으시고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셨습니다. 이튿날 16일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및 신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은 대사가 급박하게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이 우관(寓館)에 가서 모였고, 경리원경(經理院卿) 심상훈(沈相薰)도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박제순은 주둔한 공사(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의 급박한 요청에 의하여 혼자서 이 주관(駐館)에 갔습니다. 그런데 모두 어제 제출한 문제를 가지고 문답을 반복하였으나 신들은 끝내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밤이 되어 파하고 돌아와 폐하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뵙고 응답하였는데 문답한 내용을 자세히 아뢰었고 이어 아뢰기를, ‘내일 또 일본 대사관에 가서 모여야 하는데 만약 그들의 요구가 오늘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라면 신들도 응당 오늘 대답한 것과 같이 물리쳐 버리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물러나왔습니다. 이튿날 17일 오전에 신 등 8인(人)이 함께 일본 대사관에 모였는데, 과연 이 안건을 가지고 쟁론한 것이 복잡하였습니다. 권중현은 ‘이 문제는 비록 대사가 폐하께 아뢰었고 공사가 외부(外部)에다 통지하였지만 우리들은 아직 외부에서 의정부에 제의한 것을 접수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당장 의결(議決)할 수 없으며 또 중추원(中樞院)의 새 규정이 이미 반포된 만큼 반드시 여론을 널리 수렴해야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공사는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정치(專制政治)인데 어찌하여 입헌정치(立憲政治)의 규례를 모방하여 대중의 의견을 수렴합니까? 나는 대황제(大皇帝)의 왕권이 무한하여 응당 한 마디 말로써 직접 결정하는 것이지 허다한 모면하려는 법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에게 전통(電通)을 하여 곧바로 폐하를 만나볼 것을 청하였으니, 여러 대신(大臣)은 함께 대궐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여러모로 극력 반대하였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먼저 의정부 내의 직소(直所)에 와서 기다렸으며, 일본 공사는 관원을 데리고 뒤따라와서 휴게소에서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다가 신들이 입대(入對)하여 폐하께 각기 경위를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폐하께서는 몹시 괴로워하시며 이후의 조처에 대해 여러 번 신중히 하문(下問)하셨으나, 신들은 다만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는 말로써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자 폐하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그렇지만 감정을 가지게 할 수는 없으니 우선 늦추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이에 이완용이 아뢰기를, ‘이 일은 나라의 체통과 관련되는데 폐하의 조정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누가 감히 허락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군신(君臣)의 관계는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으니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숨김없이 다 진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사가 찾아온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며 공사가 와서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안건의 발락(發落)하는 것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군신 간에 서로 묻고 대답하는데 다만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다 밀어치우니, 사체(事體)를 가지고 논한다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겠지만 이 또한 형식상 처리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여덟 사람이 아래에서 막아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일본 대사가 폐하를 나아가 뵐 것을 굳이 청하는데 만약 폐하의 마음이 오직 한 가지로 흔들리지 않는다면 국사(國事)를 위하여 진실로 천만 다행일 것이지만, 만일 너그러운 도량으로 할 수 없이 허락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부분에 대하여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폐하께서 하교하신 것은 없었으며 여러 대신도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이완용이 또 아뢰기를, ‘신이 미리 대책을 강구하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할 수 없이 허용하게 된다면 이 약관(約款) 가운데도 첨삭(添削)하거나 개정(改正)할 만한 매우 중대한 사항이 있으니, 가장 제때에 잘 헤아려야 할 것이며 결코 그 자리에서 구차스럽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토오 히로부미 대사도 말하기를, 이번 약관에 대해서 만일 문구를 첨삭하거나 고치려고 하면 응당 협상하는 길이 있을 것이지만, 완전히 거절하려고 하면 이웃 나라간의 좋은 관계를 아마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그 약관의 문구를 변통하는 것은 바랄 수도 있을 듯하니 학부 대신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지금 이 학부 대신이 말한 것은 꼭 허락해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한 번 질문할 말을 만들어서 여지를 준비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런 것은 모두 의사(議事)의 규례이니 구애될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이때 여러 대신이 아뢴 것이 모두 권중현이 아뢴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면 이 조약 초고(草稿)는 어디 있으며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을 고치겠는가?’ 하셨습니다. 이하영이 품속에서 일본 대사가 준 조약문을 찾아내어 연석(筵席)에서 봉진(奉進)하였습니다. 이완용이 나아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 조약 제3조 통감(統監)의 아래에 외교라는 두 글자를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훗날 끝없는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 외교권을 도로 찾는 것은 우리 나라에 실지 힘의 유무(有無)와 조만(早晩)에 달렸다고 하였는데 지금 그 기간을 억지로 정할 수 없지만 모호하게 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 짐(朕)도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머리의 글 가운데서 「전연자행(全然自行)」이라는 구절은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신이 외부에서 얻어 본 일본 황제의 친서 부본에는 우리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번 약관은 나라의 체통에 크게 관련되지만 일찍이 여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부득이해서 첨삭하거나 고치게 된다면 이것도 응당 따로 한 조목을 만들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건 과연 옳다. 농상공부 대신의 말이 참으로 좋다.’ 하셨습니다. 이에 여러 대신 가운데는 폐하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하는 사람 이완용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 권중현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모두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연석에서 아뢰는 것이 거의 끝날 무렵에는 우리 여덟 사람이 똑같이 아뢰기를, ‘이상 아뢴 것은 실로 미리 대책을 강구하는 준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물러나가 일본 대사를 만나서,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물리쳐야겠습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 전에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잘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한규설과 박제순이 아뢰기를, ‘신들은 한 사람은 수석 대신이고 한 사람은 주임 대신으로서 폐하의 하교를 받들어 따르는 데 불과합니다.’ 하였습니다. 우리들 8인(人)이 일제히 물러나 나오는데 한규설과 박제순은 폐하의 명을 받들고 도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봉칙(奉勅)하고 잠시 후에 다시 나와 모두 휴게소에 모이니, 일본 공사가 어전(御前)에서 회의한 것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한규설'''이 대답하기를, ‘우리 황상폐하(皇上陛下)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하교하셨으나, 우리들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복주(覆奏, 엎드려 아룀)하였습니다.’ 하니, 공사가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국(專制國)이니 황상 폐하의 대권(大權)으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나는 이 조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알지만 여러 대신은 정부(政府)의 책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여 한결같이 군명(君命, 임금의 명)을 어기는 것을 주로 삼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러한 대신들은 결코 묘당(廟堂)에 두어서는 안 되며 참정대신(參政大臣)과 외부대신(外部大臣)은 더욱 체차(遞差)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8인이 모두 반대하여도 잘라 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한규설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공사가 이미 이렇게 말한 이상 나는 태연스럽게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하니, 여러 대신이 만류하면서 해명하기를, ‘공사의 한 마디 말을 가지고 참정대신이 자리를 피한다면 그것은 사체(事體)에 있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규설이 다시 제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조금 뒤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대사가 군사령관(軍司令官) 하세가와〔長谷川〕와 함께 급히 도착하였고, 헌병사령관(憲兵司令官)과 군사령부부관(軍司令部副官)이 뒤따라 왔습니다. 일본 공사가 대사에게 전후 사연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대사가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 이재극(李載克)에게 폐하의 접견을 주청(奏請)한다는 것을 전해 주도록 여러 번이나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돌아와서 ‘짐(朕)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또 짐이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록 잘 협상하라.’는 성지(聖旨, 임금의 뜻)를 전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또 참정대신 이하 각 대신에게 성지를 널리 퍼뜨렸습니다. 대사가 곧 참정대신에게 토의를 시작하자고 요청하니, 한규설이 여러 대신에게 각기 자기의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대사가 먼저 참정대신을 향하여 말하기를, ‘각 대신들은 어전 회의의 경과만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한 번 듣고자 합니다. 참정대신은 무엇이라고 아뢰었습니까.’ 하였습니다. '''한규설'''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반대한다고만 상주(上奏, 임금에게 아룀)하였습니다.’''' 하니, 대사가 묻기를, ‘무엇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하였는지 설명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한규설이 말하기를, '''‘설명할 만한 것이 없지만 반대일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외부대신'''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물으니 '''박제순'''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바로 교섭(交涉, 협상)이니 찬성과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외부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外交權)이 넘어가는 것을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미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었으니 어찌 칙령(勅令)이 아니겠습니까? 외부대신은 __찬성하는 편입니다.__’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탁지부대신) '''민영기'''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반대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사가 묻기를, '''‘절대 반대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탁지부대신은 반대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법부대신) '''이하영'''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의 세계 대세와 동양의 형편 그리고 대사가 이번에 온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가 외교를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귀국이 이처럼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우리 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가 있는데 이제 또 하필 외교권을 넘기라고 합니까? '''우리나라의 체통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니 승낙할 수 없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지만 이미 대세와 형편을 안다고 하니,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이 발언의 응답으로 이하영은 간신히 을사 '육적'의 신세를 모면했지만 이후의 행보는... 알다마다다.] 다음으로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물으니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하교에 대하여 이미 참정대신의 통고가 있었으니 이 안건의 요지가 이미 판결된 셈이다.’[* 고종의 말도 문제가 있지만 이렇게 알아서 잘 팔아먹는다.]라고 하고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금 전 연석(筵席)에서 여차여차하게 아뢴 바가 있을 뿐이고 '''끝내 찬성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고칠 만한 곳은 고치면 그만이니 __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__’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연석에서 면대하였을 때에 대체로 '''학부대신(이완용)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딴 의견은 바로 황실(皇室)의 존엄과 안녕에 대한 문구였습니다. 그러나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충신과 역적이 즉시 판별되기 때문에 참정대신이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반대한다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황실의 존엄과 안녕 등에 대한 문구는 실로 더 보태야 할 문구이니 __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__’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군부대신) 심근택('''이근택''')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도 연석에서 '''학부대신과 같은 뜻이었으나'''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충신과 역적이 갈라지기 때문에 '''농상공부대신과 같은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내부대신) '''이지용'''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 또한 연석에서 '''학부대신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또 내가 일찍이 작년 봄에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공사(公使)와 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의 약관 중 독립을 공고히 하고 황실을 편안히 하며 강토를 보전한다는 등의 명백한 문구가 있으니, '''애당초 이 사안에 대하여 가부를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오적 + 이하영의 발언들 가운데 가장 뻔뻔한 대답이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곧 이재극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며 말하기를, ‘이미 삼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칙령을 받들었기 때문에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그들의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그 실제를 따져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대신 뿐입니다. 주무대신(主務大臣)에게 성지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調印, 도장을 찍음)하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한규설이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으니 대사가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울려고 합니까?’ 하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이재극이 돌아와서 폐하의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협상 문제에 관계된다면 지리하고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셨습니다.’ 하고, 이어 또 이하영에게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약관 중에 첨삭할 곳은 법부대신이 반드시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하였습니다. 각 대신 중 오직 '''한규설과 박제순'''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심근택 및 민영기, 이하영은 모두 자구(字句)를 첨삭하는 마당에서 변론하는 것이 있었으나 이때 한규설은 몸을 피하기 위하여 머리에 갓도 쓰지 않고 지밀(至密, 은밀함)한 곳으로 뛰어들었다가 외국인에게 발각되어 곧 되돌아 들어왔습니다. 마침 그 때 양편에 분분하던 의견이 조금 진정되어 대사가 직접 붓을 들고 신들이 말하는 대로 조약 초고를 개정하고 곧 폐하께 바쳐서 보고하도록 하여 모두 통촉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부강해진 다음에는 이 조약이 당연히 무효로 되어야 하니 이러한 뜻의 문구를 따로 첨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다시 폐하의 칙령을 전하니 대사가 또 직접 붓을 들어 더 적어 넣어서 다시 폐하께서 보도록 하였으며, 결국 조인하는 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의 사실은 단지 이것 뿐입니다. 그런즉 신들이 정부의 벼슬을 지내면서 나라의 체통이 손상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죽음으로 극력 간쟁하지 않았으니 신하의 본분에 비추어볼 때 어찌 감히 스스로 변명할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탄핵하는 사람들이 이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 않고 그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 등 5인(人)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이 조약에 대한 죄를 정부에다 돌린다면 '''8인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지'''[* (...)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간다. 하긴 5적에 민영기나 이하영, 이재극이 끼지 않고 박제순처럼 민영기와는 반대로 조약 내용엔 참여하지 않은 자도 있으니 자기들 딴엔 억울할 수도 있겠다. 특히 이완용 정도라면 억울(?!)할 만도 할 것이고... 이 글의 후반부는 한규설을 위선떤다고(!!) 까고 있다.] 어찌 꼭 5인만이 전적으로 그 죄를 져야 한단 말입니까? 한규설로 말하면 수석 대신이었습니다. 만일 거센 물살을 견디는 지주(砥柱)와 같은 위의와 명망, 하늘을 덮을 만한 수단이 있었다면 비록 자기 혼자서라도 앞장서 밤새도록 굳게 틀어쥐고 갖은 희롱을 막는 등 술수가 없는 것을 근심할 것이 없겠지만, 연석에서 면대할 때에는 전적으로 상(上)의 재가(裁可)만 청했고 외국의 대사와 문답하는 자리에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말이 성지였다는 것을 성대하게 말함으로써 전제(專制)하는 데 구실이 되게 하였습니다. 여러 대신의 숱한 말들이 무력한 지경에 똑같이 귀결되게 하고 빈 말로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울고 싶고 도망치고 싶다고 하며 거짓으로 명예를 꾀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대의(大議)가 이미 결정됨에 미쳐서 조약 초고를 찢어 버리거나 인신(印信)을 물리칠 수 없었으니 신 등 5인과는 애당초 같다 다르다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외국 대사가 일을 끝내고 돌아간 후 정부에 물러가 앉아서는 정해진 규례도 준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상소하여 신들에게 죄를 떠넘김으로써 허실(虛實)이 뒤섞이게 하였습니다.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다만 죄를 면하기 위해 스스로 도모한 것에 불과합니다. 시험 삼아 한규설의 잘못을 논해 보면 응당 우리들 5인의 아래에 놓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밖에 반대한다고 말한 대신들로 말하자면, 처음에는 비록 반대한다고 말하였지만 끝내는 개정하는 일에 진력(盡力)하였으니, 또한 신 등 5인과 고심한 것이 동일하며 별로 경중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걸핏하면 5인을 들어 실제가 없는 죄명을 신들로 하여금 천지(天地)간에 몸 둘 곳이 없게 하는 것입니까? 신 등 5인은 스스로 목숨을 돌볼 겨를이 없이 하였건만 당당한 제국의 허다한 백성들 속에 깨닫고 분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마치 한 마리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모든 개가 따라 짖듯이 소란을 피워 안정되는 날이 없으니 이 어찌 한심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탄핵하는 글로 말하면 반드시 증거를 확실하게 쥐고서야 바야흐로 등철(登徹)할 수 있는데 저 무리들에게 과연 잡은 증거가 있습니까? 사실을 날조하여 남에게 죽을죄를 씌운 자에게는 의당 반좌율(反坐律)이 있는 것이 실로 조종(祖宗)의 옛 법입니다. 무릇 위 항목의 일들은 폐하께서 환히 알기 때문에 곡진하게 관대히 용서하고 차마 신들에게 죄를 더 주지 않았으며, 파면시켜 줄 것을 아뢸 때에는 사임하지 말라고 권했고, 스스로 인책할 때에는 인책하지 말라고 칙유하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들의 몸이 진토가 되어도 기어이 보답하여야 할 기회이건만 저 무리들은 폐하께서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고 날로 더욱 떠들어대면서 치안(治安)에 해를 주고, 정령(政令)이 지체된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심보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의 체통을 깊이 진념하시고 속히 법사(法司)의 신하에게 엄한 명을 내리시어 이런 혼란스런 무리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구함(構陷)하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모두 죄의 경중을 나누어 형률을 적용하여 징계함으로써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 주신다면 이것이 어찌 신 등 5인에게만 다행한 것이겠습니까?”|| 이 말을 좀 쉽게 풀어 보자면 을사조약을 체결했지만 제국과 황실의 존엄도 건재(?)하고 종사도 안전한데 '''오로지 외교만 일본에 잠시 맡긴 것이고 언제든 나라가 부강해지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인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을사조약 이거 미뤄봤자 뭐 어차피 체결될 것이었고 과거 의정서, 협정서 체결할 땐 조용하다 왜 이제 와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건지 참 어이가 없네요."라는 이야기 되겠다. 물론 이완용의 말은 원론적으로는 맞다. 종사도 여전히 건재해 있었고 나라가 (일본보다) 부강해지면 자연스레 되찾을 테고 어차피 체결되는 건 황제 이하 내각 전원이 다 반대하든 그 정반대든 같았고 한일의정서의 주 골자 중 하나가 대한제국에 재정 고문, 외교 고문을 두는 건데 당연하겠지만 외국인 고문에 이들은 모두 일본이 앉힌 각각 일본인, 미국인이다. 즉 말만 1905년에 외교권이 강탈된 거지 실질적으로는 이전에 이미 뺏겼다. 하지만 종사가 곧 나라란 건 아니고 각 부처에 일본인 고문이 들어와 사실상 내정간섭까지 당하게 되었고 부강해지도록 일본이 놔 둘 리 없으며 어차피 체결될 조약이긴 하지만 '''이런 부당한 조약'''에 찬성한 것만으로도 욕먹을 거리가 되며 의정서, 협정서를 맺을 때 이들도 조용했다. 한마디로 방귀뀐 놈이 성낸 것보다도 더 '''"헐~"''' 이란 말밖에 안 나올 뿐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틀렸다. 왜냐하면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될 당시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일의정서는 [[러일전쟁]]이 터진 직후에 체결되었다. 제1차 한일협약도 고문 정치를 명시하고 있으나 이 시기도 러일전쟁 초기고 무엇보다 외세에 의한 외국인 고문은 이때 처음 임명된 것이 아니다. 일본이나 청, 그리고 대한제국도 스스로 외국인 고문들을 두고 있었고 청의 이홍장이 임명한 데니나 위안스카이가 임명한 마젠창, 묄렌도르프 등도 있다. 이들은 임명을 누가 했건 결국 돈 주는 사람에게 충성했던 이들이다. 일본의 차이는 그 돈주머니를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를 임명했기 때문에 같이 임명된 더럼 스티븐스도 같이 일본인 나팔수를 했다는 것 정도다. 만일 당시 대부분의 예상대로 러일전쟁이 러시아의 승리 혹은 러시아 우세로라도 끝났으면 위 두 조약이나 두 고문들은 한방에 다 날아간다. 당장 이완용만 해도 친미-친러 루트를 탄 정부 고관이라서 저 두 조약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우세를 보이니 고문들의 활동도 강제력이 강해지고 이완용도 친일로 건너가면서 자신의 변절에 대해서 물타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물타기에 대해서 황제권 보호를 들었는데 이건 얼굴마담 역할을 하겠다는 것으로 뒤에 정확하게 같은 위치를 노린 인물이 날아와서 이완용과 대립을 하니 이 사람이 다름아닌 [[박영효]]라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