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오딘지엠 (문단 편집) ==== 한계와 문제점 ==== 응오딘지엠 정부는 1956년부터 농지개혁을 시작했고, 1957년부터 1960년까지 평균 경제 성장률은 7.2%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쌀 생산량에 있어서 선농업발전정책이 성과를 거두었던 것은 사실이다. 1954년 지엠 집권 초기와 1963년 지엠 집권 말기를 비교해보면, 1954년 2,565,540톤에서 1963년 5,326,680톤[* 다만 버나드 폴은 1963년 수치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으로 늘어났으며, 고무의 경우 1954년 54,917톤에서 1963년 76,200톤으로 생산량이 증가했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681~690을 참조.] 그러나 7.2%의 경제성장률은 전전에 비해 더 발전해 가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성장의 양적 지표는 남베트남이 전후 경제재건 사업과 경제회생작업에서 초기부터 실패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수는 있으나, 이러한 성장이 보다 높은 단계로의 진보라기보다는 이전 경제 수준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지엠정부의 선농업발전정책을 가장 크게 제약했던 것은 청산하지 못한 반봉건적 농업체제였다. 지엠의 농지개혁은 반봉건적 경제질서를 해체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지엠 정부 하에서 남베트남의 지주들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있던 과거의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기업가적 지주로 전환하지 못했다. 이는 농민에 대한 착취를 강화했을 뿐 실질적인 생산성 향상에는 전혀 기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경제적 혜택은 돌아가지 않았으며, 대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정부의 조세 추출이 증대됐다. 이는 지엠 정부에게는 안정적인 지역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농민에게는 전쟁기간에 사라졌던 중앙정부의 수탈체제가 다시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지엠 정권과 농민들의 관계는 날로 악화되었으며, 농촌에 근거지를 형성한 베트콩이 대다수 농민들에게 지지받는 현상이 벌어지게 됐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681~692를 참조.] 아래의 인용문을 보도록 하자. > 정부가 후원하는 토지재분배계획은 이전에 베트민에 의해 수립되어 농민들에게 보다 유리하게 되어 있던 토지분배를 폐지하였다. 그래서 토지분배로 인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 측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의 범위가 넓어진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이러한 선택권 중에서 [[베트콩|반란에 참여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 >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690 아래의 인용문은 민주화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리영희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다루고 있는 응오딘지엠 정부가 단행한 토지개혁의 문제점이다. > 디엠 정부는 전국 농토 가운데서 45만 7,000 헥타르를 몰수하였고,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인 전 개인소유지 24만 6,000 헥타르를 베트남 정부에게 반환했는데, 정부가 1958년까지 농민을 위한 농지개혁 계획으로 농민에게 재분배한 것은 프랑스인 소유로 반환된 것에 해당하는 24만 8,000 헥타르 밖에 안된다. 최근의 미국 AID 보고에 의하면 분배되지 않은 농지는 대부분 정부가 쥐고 있으며 정부는 그것을 최고가격으로 입찰하는 자에게 임대하고 있다. >----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2006, p.374~375[*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리영희 교수가 인용한 자료는 서방권에서 베트남 근현대사 연구 1차 사료로 인정받는 버나드 폴(Bernard Fall)의 저작이다.] 반면에 공산주의자 세력들은 주민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민중들 깊숙이 파고 들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교수 제프리 레이스(Jeffery Race)는 당시 베트민과 주민들이 어떠한 관계였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베트민은 주민들과 같이 잠을 잤지만, 마을위원회의 유지(남베트남에 협력하는 인사)들은 기지에서 군인들과 함께 잠을 잤다. >---- >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690[* 원출처는 제프리 레이스의 War Comes to Long An, Berkel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2]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응오딘지엠 정부의 이러한 문제점은 결과적으로 베트남공화국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의 요구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응오딘지엠 정부는 대도시의 부유한 지주나 부르주아지만이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었으며, 그 결과 토지개혁 법안은 지주들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고, 토지개혁이 몇 년 동안 실시된 후에도 자격을 갖춘 소작인들 가운데 실제로 토지를 받은 사람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이전에 베트민이 장악했던 지역에 사는 농민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민 전쟁)동안 받았던 토지를 전 주인에게 돌려주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는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따라서 농민이나 전국의 다른 많은 농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응오딘지엠 정권은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 정권보다 나을 것이 거의 없었던 셈이다.[*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744~745] 아래는 마릴린 B. 영의 저서 에 나오는 내용이다. > 10/59법과 같은 정부의 테러행위는 남베트남 농촌지역에서 또 다른 문제들을 악화시켰다. 지주들에게 이미 분배된 땅을 되돌려줌으로써, 농민들은 프랑스 식민지 통치시절처럼 다시 한 번 무토지 소유자나 빈농이 됐다. 강제노동을 포함한 과거 베트민 시절 폐지된 세금이 다시 부활했고, 각급관료조직들의 공공연한 부정부패가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지방 민병대를 징집하여 강탈과 자의적인 체포를 일삼았다. >---- > Marilyn B. Young, 『The Vietnam Wars 1945-1990』, Harper Prennial, 1991, p.62 위의 인용문처럼, 지엠 정부의 토지개혁은 오히려 대다수 농민들에게 역효과를 냈다. 특히 1960년에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존재는 정부와 농민의 갈등을 심화시켰는데, 특히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농지개혁은 정부와 혁명세력의 차이를 확연히 갈라놓았다. 역사학자 피츠 제럴드(Fitz Gerald)는 당시 민족해방전선의 농지개혁이 응오딘지엠 정부 하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민족해방전선의 계획은 토지 없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민족해방전선은 토지 보유나 지대를 제한하는 전국적인 법률을 기초로 하는 대신에 모든 마을에서 토지 분배와 지대를 가능한 한 공평하게 하려고 했다. 그들은 삼각주의 상이한 부분들에 나타나는 극히 다양한 사회적 유형과 토지 보유 유형을 고려하면서 기존체제의 폐단을 최소화하기보다는 테러를 포함해서 가능한 온갖 수단으로 농민계급 전체의 경제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일했다. 민족해방전선은 삼각주의 대부분에서 농민들이 생산한 작물에 대한 권리를 그들에게 주고, 그들 자신의 협상권 및 지주에 대한 평등 의식을 심어 주었다. >---- >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692~693 <호치민 평전>을 집필한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1959년부터 1960년 사이 반정부 세력 지도자들은 필사적인 방법에 의존하려 했으며, 1959년 8월 말 꽝응아이성의 척박한 산악지대에 사는 수많은 농민들이 모여 남베트남 정부의 국회의원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베트민 세력의 지원을 받은 시위자들이 있었고, 이들이 중부 산악지대에 자리잡은 인근 16개 마을을 장악했고, 잠시나마 50개 마을에서 1만 명 이상의 주민으로 이루어진 해방구를 형성하기도 했었다.[* 이 시기 해방구는 공식적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창설되기 전에 만들어진 해방구다.] 특히나 메콩강 삼각주 중심부의 키엔호아 성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는데, 항불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절부터 베트민 활동가들이 친불 지주들의 경작지를 몰수하여 빈농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이 지역 대다수 주민들이 베트민이 이끄는 혁명 운동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또 동참하고 있었다. 이 지역 대다수 주민들이 베트민 혁명운동에 공감한 이유는 '''1954년 제네바 협정 뒤 지주들이 다시 돌아와 남베트남 정부군의 지원을 받으며 토지를 도로 빼앗아갔고, 토지를 분배받은 빈농에게 체포와 수감 그리고 처형을 포함한 가혹한 보복을 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755~756] 1961년 융안([ruby(隆安,ruby=Long Anh)])에서 민중봉기에 가담했던 한 무토지 농민은 응오딘지엠 정부 하에서의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으며, 왜 베트콩에 가입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 나는 가난했다. 나는 땅을 전부 빼앗겼다.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돌보기도 힘들었다. 1961년에 공산당이 주도하는 민족해방전선의 선전 요원들이 나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들과 만나 부자와 빈민 계급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부자들이 항상 프랑스에 봉사해 왔으며 프랑스 당국의 힘을 빌려 빈민을 억압했다고 말했다. 다른 생존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빈민들은 지주의 노예로 전락했다. 당원들이 우리에게 선전한 내용은 빈민들이 부자에 맞서 일어서지 않으면 영원히 지배받으리라는 것이었다. 자유를 쟁취하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우리 마을 주민은 약 4,300명이었다. 이 가운데 아마 10여 명 가량이 지주였을 것이다. 최고 부자가 500헥타르를 소유했고, 나머지가 각각 적어도 20헥타르씩 가지고 있었다. 다른 주민들은 소작인이거나 순수한 빈농이었다. 나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억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해방전선(베트콩)에 가입한 것도 그 때문이다. >---- > 미국의 베트남 전쟁 p.60~61 따라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정책과 정치적 목적이 대다수 농민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또 실제로 대다수의 남베트남 지역에서(특히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 지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응오딘지엠 정부의 개혁은 프랑스 식민지 체제로부터 비롯된 지주와 소작농 간의 봉건적이고 식민주의적 모순관계를 심화시킨 셈이다. 따라서 응오딘지엠 정부의 초기 바오다이 정권 축출을 통한 친불파 제거는 어디까지나 친바오다이 성향의 친불파를 숙청 및 흡수한 것이지, 그것이 식민주의적 잔재의 청산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관계는 응오딘지엠 정부가 추진했던 개혁의 한계에서 드러나는 셈이다. 정말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부가 식민주의적 잔재를 청산했다면, 군부에 프랑스군 출신 인사들이 버젓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장교와 사령관을 하는 것은 뭐라 설명해야 할까? 그 점에서 응오딘지엠 정부는 근본적으로 식민주의적 잔재가 명확히 남아있는 비상식적인 정부였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결정하던 케네디의 문제이기도 했다. 아래의 논문 내용을 보자. > 케네디에게 베트남은 다른 어느 곳보다 각별했다. 그는 상원의원 시절인 1956년 남베트남의 고딘디엠(Ngo Dinh Diem) 대통령을 "동남아시아의 자유세계의 주춧돌"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케네디가 그렇게 생각한 데는 남베트남 정부와 엘리트들에 대한 그의 그릇된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케네디는 미국이 프랑스처럼 제국주의국가가 아니며 디엠과 그의 지지자들 거의가 실은 프랑스식민지 지배의 앞잡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식민지지배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건강한 민족주의자들로 보았다. 케네디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을 받고 조직된, 그리고 미국에 충성스런 자들이었다. >---- > 김정배, 「베트남전쟁과 미국, 그리고 냉전체제」, 『역사와 경계』 80, 2011, 257~258쪽. 따라서 응오딘지엠 개인이 자신 나름의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가 구성한 남베트남 정부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에 부역한 민족반역자들이 차고 넘치며, 항불투쟁을 한 독립운동 세력인 베트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으로 민중들에게 비춰질 수 밖에 없었다. 즉, 정치, 사회, 군사 부분에 프랑스에 협력한 민족반역자들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니, 어찌보면 민중들의 반발은 당연한 결과였다. 2017년 켄 번즈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인 PBS 베트남 전쟁에서도, 북베트남군 참전용사이자 문학가인 바오닌(Bao Ninh)은 '''프랑스군이 철수한 다음 미국이 들어왔고, 그의 부모님 세대에게 당신과 같은 미국인들이 프랑스인과 다를바가 없었으며, 미국도 침략자였기에 아들로서 그런 부모님의 생각을 물려받았다'''고 인터뷰에서 증언했는데, 당시 응오딘지엠 정부의 문제점과도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 응오딘지엠 정부 개혁의 또 다른 문제를 뽑자면, 바로 [[가톨릭]] 중심의 사회체제 형성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응오딘지엠 정부의 큰 문제점은 식민지 지배 체제 협력자들과 소작농의 계급적 민족적 모순관계인데, 가톨릭 중심의 사회체제는 이러한 모순관계를 더욱 뚜렸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역사를 전공한 유인선 교수에 따르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을 적극 지지해주는 세력은 대략 100만 명 정도의 가톨릭 교도들 뿐이었다고 한다.[* 베트남의 역사(2018년 개정판) p.357] 즉 이러한 상당수의 가톨릭 교도들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에 따라 남북 분단이 되자 월남했고, 응오딘지엠 정부 사회에서 국가교회의 역할을 했던 세력으로 성장했다. 반면에 남베트남에서 가톨릭과 대척점에 있으며 민중교회의 역할을 했던 것은 불교였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534] 1960년 남베트남의 가톨릭 교도는 약 1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7% 정도를 점했는데, 비공식적 조사로는 고위 공무원 가운데 34명이 가톨릭 교도이고, 20명 가량이 불교도였으며, 제1대 국회의 123명의 의원 가운데 22~27% 정도가 가톨릭 교도였다. 특히 이 가톨릭 교도들은 정부 조직에서도 교육, 외교, 정보, 민사 부서와 같은 대내외 통제 및 관리 부문에 배속되어 주로 활동하였고, 특히 정보국에서의 활동은 두드러졌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534~535] 아무튼 지엠 정부의 이런 반민중적 친가톨릭적 정책은 80%가 불교지향의 종교를 지니고 있었던 남부의 피지배계급에게는 지엠 정부가 자신들을 대표하는 것이 아닌 가톨릭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인식하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켰던 것이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537] 또한 응오딘지엠은 내부 평정에 있어서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이젠하워와 케네디 정부는 도미노 이론에 따라, 남베트남에서라도 반공주의적인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당시 미국이 무장한 최신식 무기와 남베트남군을 지원하는 미군사고문단을 보냈고, 1962년에는 MAC-V를 창설하기도 했다.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미국은 1954년 6월부터 남베트남의 군대를 훈련시킨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막대한 물자와 군사적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초기 미국은 폴 하킨스가 보내는 보고에 따라, 내부 평정이 잘 되는 것으로 착각했다. 1962년 초반의 경우 헬리콥터 기습 공격으로 베트콩을 섬멸해 남베트남군이 승리한 적이 두어 번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베트콩은 1963년 압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응오딘지엠 정부의 군사력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들어냈다. 군의 군사능력 강화에 실패한 남베트남 정부는 1964년 빈지아 전투와 1965년 동쏘아이 전투 등에서도 비슷한 졸전을 기록하게 되며, 결국 대규모 미 지상군이 들어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따라서,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응오딘지엠 정부는 남베트남에서의 현대식 군사 장비를 무장하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군사적으로 유능한 군대를 길러내는 데는 실패한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