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오딘지엠 (문단 편집) === 백색테러와 학살 === > 지엠이 가장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은 과거 반프랑스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민 세력이었고, 이에 대한 대중들의 동조였다. 또한 당시 지엠은 이중의 압력, 곧 한편으로는 토지개혁과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 대한 압력, 다른 한편으로는 1956년 평화적 통일선거 이행에 대한 압력에 봉착해 있었다. 지엠은 이런 불안과 압력을 멸공(diệt cộng)ㆍ반공(tố cộng)의 입장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 >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325 > 응오딘누의 비밀경찰이 자행한 게슈타포 같은 행동이나 고문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확실한 공산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 동조자들에게 국한하여 이런 행동을 했다면 사람들이 그런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억압은 단순히 다른 정당의 대표나 대변인처럼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되어 갔다. 또한 정부의 학정에 항거하는 보통 사람들을 탄압·투옥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13 > 남베트남에 언론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 정부군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총살을 당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7~448[* 책에서 인용한 출처는 Hans Morgenthau, Vietnam Chief a Multi-Paradox, Washington Post, 1956.02.26] > 디엠의 지지자이자 고문인 조셉 버팅어(Joseph Buttinger)는 1956년 대규모 원정대의 병사들이 "공산당 점령 지역에서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했다"고 설명했지만 '''[[학살|이들은 마을을 습격하고 수백 혹은 수천 명의 농민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 > 여론조작 p.320~321[* 책에 인용된 출처는 Political Economy of Human Rights, (Boston: South End Press, 1979)] > 베트민 전직 인사들에 대한 지엠의 소탕작전은 1955년 말에 시작됐다. 베트민의 깃발아래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수천수만의 인사들은 체포되고 구금됐으며 강제 수용소에 투옥됐다. >---- > The Vietnam Wars 1945-1990, Marilyn B. Young, Harper Prennial, p.56 > 디엠의 통치 초기부터 전개되어 온 '''소요진압'''은 '''베트민이나 반란군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증거나 재판도 없이 죽이거나 체포하는 일이었다.''' 지방 단위의 무수한 소규모 유혈사태, 그밖에 농촌주민에 대한 디엠의 군사정벌에 따라 보다 대규모의 유혈사태들이 발생했다. >---- > 미국 대외정책론 p.352~353[* 원출처는 David Hotham, in Richard Lindholm, ed., Vietnam; The First Five Years(Michigan States, 1956), p.359]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처럼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 또한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적잖은 규모의 테러와 학살을 저질렀다. 테러나 학살의 수법은 전형적으로 미국이 작의적으로 내세우는 친미 반공국가들과의 유사성을 보였으며, 따라서 양민 전체를 공산주의자로 생각하고 자행하는 야만적인 학살과 테러가 지엠 정권 하에서도 합리화되고 동반됐다. 미국 외교 사학자 가브리엘 콜코에 따르면, 아무리 낮게 추산해도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최소 12,000명 이상의 사람이 살해되었고, 1958년 말까지 약 40,000명의 정치범이 수감되었다.[*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67 원 출처는 가브리엘 콜코의 저서 Anatomy of War, The New Press, 1994, p.89][*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베트남 전쟁 편을 강연했던 김봉중 교수(미국사 전공) 또한, 이 수치를 인용했다.] 베트남 전쟁 관련 책을 쓴 역사학자 마릴린 B. 영 또한 1956년 1월 지엠은 법령 제6호를 발동하여 총선을 주장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구금했으며, 대략 12,000명을 살해하고 50,000명 이상을 구금했다고 주장했다.[* The Vietnam Wars 1945-1990, Marilyn B. Young, Harper Prennial, p.56]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10/59법을 발동하기 전인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최소 2,000명 이상이 처형당했다고 책에서 썼다.[* 호치민 평전 p.743][* 그러나 이 숫자는 처형으로서의 학살에 대한 제한된 기간의 숫자를 인용한 것이며, 응오딘지엠 시절 단두대에 보내져 처형당한 정치범의 숫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지엠 정부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된 작전으로서의 학살의 수치를 언급한 것은 아니다.] 당시 응오딘지엠은 동생 누를 총통 고문으로 임명해 비밀경찰 책임자로 맡기고 깐라오당 조직을 이용하여 반정부세력을 탄압했다. 남베트남의 무차별 백색테러을 실행했고, 적잖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알렉산더 켄드릭은 <미국의 갈등(The Wound Within)>이란 책에서 응오딘 누의 비밀경찰이 집권 기간 동안 총 75,000명을 살해했고, 5만 명을 투옥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책인 <끝없는 전쟁(Our Endless War)>이란 책에선 응오딘지엠 정권의 마지막 육군총참모장이었단 진문돈([ruby(陳文敦,ruby=Trần Văn Đôn)]) 중장은 '''그들은 제멋대로 체포했고, 집단수용소에서는 아무런 법적인 보호 조치도 받을 수가 없었으며, 기간도 정해지지 않은 채 감금했고,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암살도 서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12~113] 베트남 공산당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산하에 있는 베트남공산당사연구회에서 나온 <베트남 공산당사>를 보면, 응오딘지엠은 1954년말부터 응안썬(Ngan Son), 찌탄(Chi Thanh), 쩌 드억(Cho Duoc), 모 까이(Mo Cay), 빈탄(Binh Thanh) 등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나온다. 특히나 수 차례에 걸친 공산주의자 토벌 작전에서 그러한 인명살상이 이러났다고 하며, 1958년 12월 1일 푸로이(Phu Loi) 수용소에서는 수감중이던 수천 명의 베트민과 그 지지자들이 독살당했다고 한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남베트남에서 466,000명의 공산주의자와 애국지사[* 베트민 지지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들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400,000명이 수감되고 68,000명이 살해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사, 베트남공산당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 산하 베트남공산당사 연구회, 김종욱(옮김), 소나무, 1990, p.103] 반면 2018년에 출간된 맥스 헤이스팅스(Max Hastings)의 저서 < Vietnam: An Epic Tragedy 1945–75>를 보면 이 숫자를 인용하지만, 이러한 추산은 호치민의 토지개혁 희생자들 처럼 부풀려졌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고 언급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2015년 베트남 공산당의 서기장인 [[응우옌푸쫑]]은 위의 수치를 인용하며, 응오딘지엠 정권이 그만큼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다고 말했다.[[https://ninhhai.ninhthuan.gov.vn/portal/Pages/2021/bai-phat-bieu-on-lai-truyen-thong-91-nam-ngay-thanh-lap-dang-cong-san-viet-nam-b51ada.aspx?fbclid=IwAR36yiYrxX3lyApXLXv9gt7ihSmdRz8YuLtf7RaG4vna0Pu3Pp9kI9bN_V0|베트남측 기사]] 박사 학위 논문으로 <베트남과 한국 반공독재국가형성사>를 집필한 윤충로 교수[* 베트남사 전공자로 <베트남 전쟁과 한국의 사회사>등 다수의 저서 및 논문들이 있다.]는 응오딘지엠이 집권하고 몇 년 사이에 874개의 감옥에 275,000명이 감금되고, 53만 명이 고문으로, 230,000명이 지뢰나 폭탄에 의해 불구가 되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80,000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한다. 윤충로 교수는 쩐반쟈우의 자료가 수치의 과장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를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으며, 1956년 남베트남 정부는 최소 20,000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재교육센터에 감금되었다고 발표한 반면, 드빌레는 50,000명으로 추정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1971년에 세상에 공개된 펜타곤 페이퍼에도 '''하노이와 농촌의 과격분자 사이에는 어떠한 직접적인 연관도 없었다'''고 밝혔으며, 지엠 정부의 강제 수용소를 조사했던 호니(P.J Honey)도 '''수감자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도, 공산주의 지지자들도 아니었다'''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지엠 정권의 폭력은 이념적 지향에 따라 선별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 사회개혁과 통일선거를 요구하는 모든 세력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해졌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6~327] 베트남어 위키 자료에도 이 수치가 미국인의 추정치로써 인용되어 있다. 관련문서인 [[https://vi.wikipedia.org/wiki/T%E1%BB%91_C%E1%BB%99ng_di%E1%BB%87t_C%E1%BB%99ng|Tố Cộng diệt Cộng]]을 참고해도 좋다. 1957년 기준으로 광의성에만 최소 6,000명 이상의 정치범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민을 구금하기 위해 사용된 풀로 콘도르(Poulo Condore) 섬은 응오딘지엠 정부의 반공정책이 시작되자, 다시한번 죄수들로 꽉 차게 됐다. 당시 수감되었던 한 베트민의 증언에 따르면 그 안에서 아주 야만적인 고문이 자행되었다고 증언했을 정도.[* The Vietnam Wars 1945-1990, Marilyn B. Young, Harper Prennial, p.61][* 프랑스의 식민지화와 침략에 맞서 베트민이 독립투쟁을 벌이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의해 수감된 정치범 보다 미군 점령기인 응오딘지엠 시대와 [[완문소]] 시대에 수감된 정치범들이 더 많다. [[완문소]] 정부만 하더라도 1972년 기준으로 정치범이 30만 명이나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무고한 피해였다.] 1967년 3월 랜드 연구소에서 작성한 연구 조사 자료를 보면 항불전쟁 당시 베트민 병사였던 한 사람의 증언을 인용한 것이 나온다. 전직 베트민 투사였던 한 사람은 그의 마을에서 있었던 응오딘지엠 정부의 테러행위 및 유혈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우리 마을 촌장은 외지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잔인했다. 그는 항불운동 당시 공산당 당원이었던 사람들을 모두 추적하여 그들을 체포하고 살해했다. 그는 우리 마을에서 모두 합쳐 14명의 공산당원을 살해했다. 나는 무림([ruby(懋林,ruby=Mậu Lâm)]) 마을에서 그가 두 명의 공산당원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들은 두 손을 등뒤로 결박당한 채 군인들에 의해 생매장되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J.J Zasloff, Origins of the Insurgency in South Vietnam, 1954~1960: The Role of the Southern Vietminh Cadres(RAND, March 1967), p.11] 베트남 중부인 꽝남성에서 저항군이었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1956년 꽝남의 지방당국은 이전의 항불 저항군들에 대한 테러조치를 시작하였다. 저항군 부대 1만 명이 체포되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학살당했다. 나는 내 목숨을 부지해야 했으며 그래서 1960년까지 산 속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같은 마을 출신의 다른 3명과 함께 살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부족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J.J Zasloff, Origins of the Insurgency in South Vietnam, 1954~1960: The Role of the Southern Vietminh Cadres(RAND, March 1967), p.12~17] 응오딘지엠 정부가 이러한 테러와 탄압을 가속화하자, 당시 하노이 당국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1955년 말부터 디엠이 '공산주의자 고발' 운동을 장려하면서, 애국자와 저항운동자에 대한 사냥이 심해졌다. 운동가들은 농촌에서 살면서 정치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이전의 저항기지였던 갈대평원, 우 민 밀림, D와 C 저항지대(사이공의 서부와 북서부)로 피신했다.[* 호치민 평전 p.694~695] 이러한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소위 전직 베트민 출신들을 포함한 지지자들이 테러와 무장투쟁을 시작하기 전인 응오딘지엠 집권 초기부터 양민학살을 동반한 이들에 대한 학살과 탄압이 대대적으로 남베트남 정부 하에서 자행됐다는 것이다. 즉, 베트남 전쟁 초기 남베트남에서의 학살과 테러의 시작 점은 베트민과 그 지지세력이 아닌 응오딘지엠 정부였으며, 결과적으로 그 근본적인 책임은 응오딘지엠 정부에게 있는 것이다. 당시 남베트남의 미군 고문단으로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이쪽 분야를 심층있게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레이스(Jaffrey Race)는 저서 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정부의 테러 행위는 [[베트민|혁명운동측]] 보다 훨씬 심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베트민 출신에 대한 소탕작전, '공산주의 마을'에 대한 포격 및 지상공격, 그리고 '공산주의 동조자들'에 대한 검거 등이 그것이다. 1960년에서 1965년까지 롱안(Long An)에서의 혁명운동이 계속 강화되었던 것은 바로 정부측의 이러한 테러전략 때문이었다.[* Jeffrey Race, War Comes to Long An, University California, 1971, p.197] 또한 ICC(국제 통제기구 위원회)의 1954년에서 1956년 사이의 활동을 보면, 초기 휴전 상황이던 당시 남베트남에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정권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보복조치가 베트민이 자행한 잔혹행위보다 규모면에서 훨씬 광범위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1956년에서 1957년 사이 지엠 정부는 베트민을 적극 지지하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공식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응오딘지엠의 초기 후원자이자 진심어린 지지자중 한명이었던 조셉 버팅어는 '''1956년 6월 지엠은 아주 경미한 무장력조차 없는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지역에 두 차례의 대규모 토벌을 조직했다. 지엠의 병사들은 수만 명을 체포했고...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농민이 죽었다. 남베트남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민간인이 거주하는 마을 전체가 포병의 포격으로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러한 학살 사실들은 미국 언론에선 비밀로 은폐되며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출처: Edward Herman, 『Atrocities in Vietnam: Myths and Realities』, Pilgrim Press Philadelphia Boston, 1970, p.22] 심지어 이 주장은 '''응오딘지엠의 가장 큰 적이던 베트민이나 호찌민을 포함한 북베트남의 지도부가 한 것이 아닌, 응오딘지엠의 열렬한 미국인 지지자가 이후 증언한 것이다.''' 따라서, 여러가지 상황과 1차 조사자료 그리고 응오딘지엠 측근의 증언과 주민들을 대상으로한 조사를 종합해 보자면, '''남베트남 정부의 무차별적 테러행위는 베트민이 선별적으로 했던 테러보다 훨씬 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대다수 남베트남 농민들이 이런 응오딘지엠 정부의 테러행위와 무차별 농민학살에 분노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했던 사실은 당시 남베트남 농민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B. 영의 저서 에서 인용한 자료로 1963년 응오딘지엠 정부가 몰락한 이후 롱안 성[*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현 호치민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지역이다.]의 촌장이었던 한 인물이 미군사고문단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증언한 것이다. > 지엠 정권 당시 이 지역의 대다수 민중은 남베트남 정부가 모든 면에서 정말 안좋다고 봤습니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이들 중 대략 80%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따랐던 것이겠죠. 나는 이 지역의 촌장이었고, 정부가 지시하는 대로 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따르지 않으면, 비밀경찰이 나를 대리고간 뒤 죽을때까지 고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지역에서 선거를 조작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나 100만 피아스터[* 남베트남의 화폐단위]를 준다 하더라도 난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당신이 만약 입을 열게 된다면, 그 즉시 당신은 감옥에 투옥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믿어주길 바랍니다. 제가 바로 장본인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진실을 그저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 > The Vietnam Wars 1945-1990, Marilyn B. Young, Harper Prennial, p.63 1962년부터 남베트남에 미군사고문단으로 배치되어, [[압박 전투]]에 대해 진실을 알렸던 존 폴 밴(John Paul Vann)은 당시 응오딘지엠 정부의 군대가 남베트남에서 어떠한 테러 행위와 짓거리를 했는지 알았고, 그들이 하는 테러 행위에 대해 상식적으로 이해하질 못했다. 아래 닐 시핸이 쓴 의 한 구절을 보도록 하자. > 존폴밴이 보기에 후인반까오(존폴밴이 담당했던 지역의 남베트남군 사단장)나 다른 남베트남군 장교들은 '''체계적인 근거나 이유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협할 정도로 충분히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파괴하며 가축을 도살하길 원한다고 판단했다. 남베트남 측의 평정화 작전 이론은 명백히 말하자면 베트남 농민들에게 베트콩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테러를 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후인반까오나 그 지역 도지사 그리고 구청장들도 '''이러한 고문행위나 살인행위를 막기 위한 그 어떠한 일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들은 그런 테러행위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테러행위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우린 그 베트콩 빨갱이 지지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우린 그 베트콩 빨갱이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강력하고 냉정한지를 보여줄 것이다.'''는 식이었다. 그들(미군고문단과 남베트남군)이 항공공습과 포격에 대해 논할 시에 후인반까오에게서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일관된 대답은 항공기와 대포가 정부의 군사력을 과시했고, 남베트남 민중이 이를 존중하도록 만들었다는 대답뿐이었다. 또한 존폴밴은 왜 '''후인반까오와 대다수 남베트남군 장교들이 이런 잔혹한 학살과 끔찍하기 짝이 없는 가학적 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지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밴은 또한 '''남베트남군들이 일반적인 베트남 농민을 인간 이하의 생물로 간주하는 것도 알아차리게 됐다. 이들은 인간을 죽이거나 인간이 사는 마을과 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냥 동물 사냥하듯이 몰살시키고, 동굴 밖으로 내쫓는 짓을 했다.''' >---- > Neil Sheehan, 『A Bright Shinning Lie - John Paul Vann and America in Vietnam』, Vintage, 1989, p.109~110 일본의 전 요미우리 신문 기자 오쿠라 사다오는 응오딘지엠 정부는 1959년 5월 6일에 국가치안유지법을 반포하고 특별군사법정에서 반정부세력을 마음대로 투옥했다고 심층적인 취재보도를 전했다. 오쿠라 사다오에 따르면 1960년까지 응오딘지엠 정권 하에서 80만 명이 수감되고, 9만 명이 처형당했으며, 19만 명 이상이 고문으로 장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남베트남의 소위 '정치훈련센터'에는 항상 8천 명에서 1만 명이 수용되어 있었고, 400개 지역에 농민수용소를 설치해 농민들이 대대로 살아온 가옥을 파괴하고 강제 수용했다고 한다.[*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68] 심지어 1958년에는 푸 로이 감옥에서 수천 명의 정치범 죄수들이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단 하루만에 1,000명이 죽었을 정도다.[* 베트남어 위키자료인 [[https://vi.wikipedia.org/wiki/Th%E1%BA%A3m_s%C3%A1t_nh%C3%A0_t%C3%B9_Ph%C3%BA_L%E1%BB%A3i|푸로이 감옥 학살]] 문서를 참조.]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버나드 폴(Bernard Fall)[* 기본적으로 베트남 전쟁 초기에 미군의 개입을 지지했던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치민에 대해서 높게 평가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버나드 폴은 호치민의 토지개혁으로 북베트남인 5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수치는 이후 진보적인 학자들에 의해 반박당하기도 했다.]은 1957년부터 1965년까지 미 지상군 개입 이전 기간 동안 15만 명의 민간인이 미고문단이 남베트남군에게 지원한 화력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얘기했다.[* 미국 대외정책론 p.357을 참조] 응오딘지엠 정부 시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에 대한 숫자는 추정치에 따라 다르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백색테러와 학살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윤충로 교수 또한 이러한 학살과 테러의 규모가 작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달리 단기간에 벌어진 동족 내부의 심각한 대규모 학살 수준의 만행은 없었으며, 그러한 점에서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학살의 규모보다는 더 작다고 주장했다. 즉 응오딘지엠 정권하에서도 이승만 정권처럼 '작전으로서의 학살'이나 '처형으로의 학살'은 계속 진행되었고 그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지만, 남한에서와 같이 단지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가지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처럼 대규모의 무차별적인 학살이 자행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엠 정부의 [[반공주의]]적 테러 정책은 소수 기득권을 우대하고, 대다수 민중인 농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정책이었으며, 반민중 반민주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남베트남 다수의 민중들이 지엠 정부에 반감을 가졌던 것. 응오딘지엠 집권 시기 진행된 소위 '작전으로서의 학살'은 1960년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자체적으로 창설되면서 더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정부가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강하면서, 이러한 인명살상은 미군의 지원을 받은 [[헬기]]와 APC 장갑차량를 포함한 막강한 화력을 동원한 수준에 도달하기에 이르렀으며, 이후 미군의 베트남 전쟁 전면개입에서 더 광범위하게 수행되기에 이른다. 베트남 국제조정위원회의 캐나다측 인사인 휴이 캠벨(Hugh Campbell)은 미군사고문단이 개입한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대략 2년이라는 기간 동안만 보더라도 남베트남에서 16만 명의 민간인이 남베트남측의 군사작전으로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이러한 주장의 출처는 사이공 정부측의 공식적인 추정치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이들의 군사작전으로 죽은 이들 중 대다수가 민간인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https://ratical.org/ratville/JFK/ChildrenOfVietnam.html|The Children of Vietnam]]을 참조.][* 이 자료는 마틴 루터 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인물인 윌리엄 페퍼와 미국에서 소아과 의사로 유명한 벤저민 스포크가 폭로한 자료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최소 41만 명의 민간인이 미국과 남베트남에 의해 학살당했고, 이 중 25만 명의 영유아 및 어린이가 네이팜탄에 의해 희생됐다.] 특히나 응오딘지엠 정부 초기에 실행한 소위 전략촌 계획은 당시 베트남 인민들의 정서나 민족감정, 생활양식에 대한 고려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주민들은 대대로 살아오던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야만 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반된 폭력성은 극에 달했다. 전략촌 계획이 실행된 1962년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은 남베트남군을 도와 전투지원, 마을폭격, 무장 헬리콥터 출격을 통한 농민들 학살, 곡물고사작전 등이 자행됐다. '''전략촌계획에 비협조적이거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마을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폭력이 가해졌는데, 이러한 지역에 대해서는 미국의 기갑부대가 파견되었고, 네이팜탄, 제트폭격기의 폭격, 구토 유발가스의 살포 등 지역파괴전략이 수행됐다. 1962년 한 해에만도 어린이, 노인을 포함하여 최소 3만 명의 주민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윤충로, 「베트남 혁명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p.184~185]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은 <여론조작>이라는 책에서 응오딘지엠 정부의 학살과 잔혹한 테러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1954년으로 접어들면서 프랑스가 수세에 몰리자 미국은 1956년에 총선거를 실시해 베트남을 통합할 발판을 마련하기로 규정한 제네바 협정을 즉각 파기했다. 그러고는 '''무력으로 국민을 통제하면서 남베트남에 친미정권을 세웠고, 테러를 통해 저항세력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59년에는 '''미국의 조직적인 국가 테러로 많은 인명을 희생당한 남베트남의 베트민 지도자 집단이 무력을 통한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때까지 수십만 명의 국민을 살해하고 도시 엘리트들과 수많은 농민들을 차별한 친미정권의 신속한 붕괴를 꾀했다.''' >---- >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309 위에 인용된 수치의 과장과 축소를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그의 집권 기간인 1954년에서 1963년 동안 작은전쟁(처형으로서의 학살과 작전으로서의 학살을 포함)을 통해 학살당한 민간인은 대략 10만 명 정도로 보는 것이 현실적인 추산에 가까울 것이다. 한반도에서 해방 후 미군정 기간 5년 동안 최소 1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듯이, 남베트남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48년 제주 4.3 사건이나 여순사건 처럼[* 소위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5년 기간 동안 대략 10만 명 정도의 민간인이 미군정 하에서 죽었듯이,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에서도 소위 작은전쟁을 통해 이러한 학살적 정책으로 대략 10만 명이 죽었다. 즉, 그러한 점에서 백색테러와 학살의 유사성을 양측이 가지고 있는 것.], 이러한 학살적 정책을 미국이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지원했다는 점에서 당시 작전으로서의 학살로 벌어진 남베트남 정부의 자국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 행위는 분명히 비판적으로 봐야할 지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