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오딘지엠 (문단 편집) === 친프랑스 세력의 제거와 바오다이의 축출 === >내가 앞장서면, 나를 따르라. 내가 달아난다면 나를 죽여라. 내가 적들에게 죽는다면, 나의 복수를 해다오! >---- >1954년의 발언. 자신의 입지와 명망에 힘입어 수상에 오른 응오딘지엠이었지만, 오랜 세월을 베트남에서 떠나 있어 기반이 없던 응오딘지엠의 입지는 아주 불안했다. 일단, 친불 성향이 아주 강했던 베트남국의 기득권은 응오딘지엠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베트남국 정규군의 대부분은 프랑스군에게 훈련받은 군대였고, 특히 총참모장 응우옌반힌은 대놓고 응오딘지엠을 제거하겠다고 천명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친불 세력만 문제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손에 넣은 이래로 가장 오랫동안 프랑스를 상대로 항쟁한 것은 바로 불교 같은 종교 세력이었고, 20세기가 되자 이들은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같은 현대적이고 절충적인 형태의 종교들로 승화하면서 스스로의 입지를 강하게 다졌으며, 곧이어 스스로 사병조직을 만들어 프랑스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스스로의 군대의 충성심도 보장하지 못하는 와중에, 지방, 특히 안보상 중요한 [[캄보디아]] 국경 근처 지방들을 이들이 장악하고 있던 것도 불안 요소였다. 이들은 2차대전 종전 전까지 항불 군사투쟁을 계속했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는데다 종교까지 곁들여져서 지역 주민들의 막강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도 [[사이공]]은 안전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던게, 사이공에서 외항도시 붕타우로 통하는 수로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범죄조직 기반 군벌 빙쑤옌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심지어 사이공 시의 경찰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2년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여기에 미국도 아직까진 응오딘지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응오딘지엠을 지지했으나, 미국 대사 도널드 히스와 로턴 콜린스 모두 응오딘지엠은 가망이 없으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렇듯 응오딘지엠 정권은 군권, 경찰권, 경제권이 모두 친프랑스파에게 장악당하고 중앙권력마저 취약하며,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기도 힘든 매우 위태로운 상태에서 출발했다. 이 때문에 아이젠하워 정권은 콜린스의 제안에 따라 응오딘지엠에 대한 지지 철회까지 고려했다. 1954년 6월 25일, 떤썬녓 공항을 통해 귀국하여 7월 7일 정부를 구성한 응오딘지엠의 첫 과제는 90만에 달하는 탈북민의 정착이었다. 당시 북베트남에서는 가톨릭을 제국주의의 주구로 본 [[호치민]] 정권의 탄압으로 수많은 [[가톨릭]] 교도들이 탈북의 길에 올랐고 토지개혁의 실패로 정권이 흔들릴 정도의 혼란이 오면서 가톨릭 교도들이 아닌 농민들도 탈북하고 있었다. 대략 가톨릭 교도가 60~70만, 불교도가 20만 명 정도 탈북했다. 여기에 미국이 '자유의 길 작전'이라는 해군 작전을 실시하여 이들의 월남을 조직적으로 도왔고 CIA도 "성모 마리아께서 남으로 가셨다"는 소문을 북베트남에 퍼뜨려 가톨릭 교도들의 탈북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들의 월남을 유도한 결정적 원인은 미국의 막후 공작보다는 '베트민의 보복과 남베트남에서의 경제적 기회'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북베트남 가톨릭 교도들이 북위 17도 이남의 가톨릭 성지를 자주 순례한 '이주 문화'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응오딘지엠은 이들 90만의 탈북민을 매우 성공적으로 정착시켰고, 이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의 골수 지지층이 되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은 불안정한 정권 공고화에 나섰다. 가장 먼저, 첫 내각을 자신의 친지들로 채운 것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종교파 일원들과 기타 지식인들이 반 응오딘지엠 조직인 '연합전선'을 형성했으나, 한편으로는 북쪽에 공산주의자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저렇게 큰 반정부조직이 있는 걸 불안하게 생각한 일부 종교파 인원들이 응오딘지엠 체제에 합류해서 또 다른 종교파 연합조직인 '혁명위'를 창설하게 되었다. 특히나, 베트민에게 [[까오다이교]]가 배신을 당하고 프랑스와 손을 잡은 와중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부족한 돈과 인력으로도 양쪽과 동시에 싸웠던 것으로 매우 명성이 높았던 [[찐민테]]가 이 혁명위의 중진이 된 것이 응오딘지엠에게 큰 성과였다. 당시까지 응오딘지엠 본인에게는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혁명위 소속 장군들의 군사력이 그를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지엠 정권은 황실친위대장 응우옌반비에게 전복당했을 것이다. 즉, 혁명위, 특히 그들 중에서도 찐민테의 군사조직 리엔민은 베트남 공화국의 개국공신이다. 이 혁명위 자체가 종교주의자들 뿐 아니라 수많은 성향을 가지고 있던 집합체였기에, 이들과 협치를 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아냈다면 응오딘지엠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베트남에 정착시킨 영웅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https://gall.dcinside.com/m/war/1641103]] [[https://gall.dcinside.com/m/war/1635853]] ] 1955년 5월, [[사이공 전투]]를 통해 빙쑤옌의 영향력을 일소시켜버렸고, 덕분에 빙쑤옌이 소속되어있던 연합전선까지도 큰 타격을 받으면서 응오딘지엠의 입지는 점점 단단해지게 된다. 이러한 초기 성공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고, 이 때문에 응오딘지엠은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응오딘지엠은 여세를 몰아 봉건주의의 수괴라고 여긴 바오다이를 겨누었다. 1955년 10월 3일, 응오딘지엠은 신임투표를 통해 [[군주제]] 폐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정치적 선전방송을 통해 바오다이를 쾌락 추구자로 비난하고 자신은 국가를 위한 경이로운 일꾼으로 선전했다. 응오딘지엠을 행운의 상징으로, 바오다이를 불행의 상징으로 띄운 선거 전략은 주효하여 바오 다이는 98.2%의 찬성 투표를 통해 폐위되었다.[* 하지만 이 선거는 부정선거였다. 98.2%라는 결과도, 99%로 발표하려던 것을 미국에서 너무 비민주적으로 보인다고 지적해서 낮춰서 발표한 것이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하면서 이런 평을 내리기도 했다. > 사실 바오다이 정권의 통솔력의 결핍과 무기력은 베트남 인민들 사이에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싸우느냐는 감정을 일반화시켰다. 어떤 프랑스인이 나에게 말했듯이 베트남이 필요로 하는 인물은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이다. 설사 그런 인물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수반할 모든 곤란할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1955년 9월 27일에서 29일에 걸친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의 [[인도차이나]] 지원이 1956년 1월부로 프랑스를 거치지 않을 것임이 결정되자 응오딘지엠은 즉각 프랑스 연방에서 탈퇴했고, 1956년 1월 19일, 프랑스 주둔군 연장협상에서 "아무리 그들이 친할지라도 외국군의 존재는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양립할 수 없다."라고 비판하며 프랑스군 철수를 요구했다. 결국 프랑스는 1956년 4월 26일, 제네바 협정의 합의를 파기하고 공동 의장국인 [[영국]]과 [[소련]]에게 일방적인 철수를 통보했다. 1956년 3월 4일, 단독국회가 구성되었으며 7월 헌법이 국회를 통과, 10월 26일 베트남 공화국이 정식으로 탄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