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오딘지엠 (문단 편집) === 공산화의 위협과 사회 혼란의 가중 === 1955년부터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평화 공세에 돌입했다. 그 해 2월, 북베트남이 총선거를 위한 사전협의의 발판을 위해 남북간의 정상관계 회복을 제안했는데 이는 우편, 도로, 철도, 해공상 교통 재개를 의미했다. 이는 북베트남이 자신들이 선거를 통한 권력장악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도 선거를 하면 분명 호치민이 80% 이상의 득표로 승리할 것이라 보았다. 이는 '민주적이고 정통성 끝판왕인 북베트남'이 민심을 얻어서 이긴다는 이상주의적인 전망이 아니라 일당독재와 공포정치로 북베트남을 장악한 공산당이 부정선거로 이길 것이 틀림없다는 전망이었다. 가톨릭 교도 탄압, 토지개혁과 농민 학살 등을 보고 미국은 북베트남을 전형적인 [[레닌주의]] 독재정권으로 판단하여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보고 있었고 선거를 감독한 프랑스군은 남북베트남에서 동시에 난타를 당하다 손털고 나가서 공정한 선거는 이미 물건너간 후였다.][* 그러나 당시 뉴욕 타임스만 하더라도 "1955년과 1956년에 걸쳐 6개월 동안" 제네바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미국의 정책을 알리는 뉴스 보도를 단 한 건도 싣지 않았다. 미국 3종의 주요 주간지도 마찬가지였다. 선거의 회피는 공산주의자의 테러와 결집을 근거로 정당화되었다. 즉 당시 언론은 호치민과 베트민을 오로지 테러와 무력을 통한 지지 확보를 일차적 수단으로 생각하는 [[소련]]과 [[중국]]의 하수인으로 표현했다. 즉 총선 거부관련 보도도 여론조작이 있었으며 매카시즘적 반공주의적 사고관으로 베트남 문제를 본 것이지, 완벽한 사실이었다고 보기 힘들다.(여론조작 p.319~320을 참조)] 이후 북베트남은 6월, 7월 그리고 1956년 5월과 6월에 걸쳐 총선거와 통일문제를 논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천명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북베트남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1955년 1월 남베트남은 총선거를 치를 법적, 도덕적 의무가 없어 총선거를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며 북베트남의 평화공세를 거부, 무시했다. 남베트남은 제네바 협정의 당사자도 아니고, 서명도 한 적 없으니 얽매이지 않고 북베트남에는 자유가 없는데 어떻게 자유 총선거를 할 수 있냐는 것이 응오딘지엠의 논리였다. 실제로 북베트남은 독재 정권이 맞았고 선거를 감독할 프랑스 군대의 일방적 철수로 인해 선거의 안정성 역시 담보할 수 없었으므로 응오딘지엠의 논리가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그해 5월에 응오딘지엠의 견해를 지지했다. 응오딘지엠은 1955년 7월과 8월에 총선거를 위해 협의하지 않을 것임을 재통보했다. 그리고 북베트남의 전체주의 성격과 제네바 협정 위반 사례, 보장국 부재를 상기하며 북베트남을 비판했고 북베트남에 억지로 묶여 있는 사람들의 출국을 촉구하기도 했다. 통일 정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개 북진통일의 피상적 언급에서 그쳤고, 응오딘지엠의 당면과제는 남베트남 국가의 건설로 인식되었다. 미국은 1956년 6월과 7월에 응오딘지엠의 입장을 다시금 지지했다. 1958년 4월 26일 응오딘지엠은 북베트남이 남부와 비슷한 민주적 자유를 세운 후에만 선거가 가능하단 입장을 밝혔다. 한편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위원회에서 [[흐루쇼프]]가 서방과 공존을 추구하겠다고 결정한 이후, 북베트남은 한동안 남베트남과의 평화통일을 주장했지만 [[헝가리]]와 [[폴란드]]의 소요 및 중소분쟁이 이어지면서, 북베트남은 1956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11차 전체회의에서 남베트남에서 혁명조직을 점진적으로 형성하고 반동분자를 처벌한다는 비밀정책을 승인했다. 이는 남부 혁명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테러를 승인한 것이었다.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정부 관리, 교사등에 대한 테러가 이어져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북베트남은 1957년 남북베트남의 UN 동시 가입을 제안하는 소련의 제안마저 거부하고 남베트남 민족해방을 외쳤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베트남 통일을 원하는 북베트남에게 UN 동시가입은 분단의 영구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북베트남]]이 사주한 테러가 이어지자 응오딘지엠은 농촌을 안정시키고 혁명을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2천명 이상이 처형되고 수천명이 동조자로 투옥되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 지역의 혁명역량이란 것 자체가 붕괴될 지경에 이르자 1959년 1월 북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15차 전체회의를 열고 혁명전쟁전략 채택을 결의하면서 그해 늦여름부터 남베트남의 무장 저항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1960년 9월 5일 하노이의 베트남 노동당 3차 전국대회가 결성, 미국의 개입 없이 응오딘지엠을 무너뜨리기 위한 방책으로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시켰다. 이로써 1959년까지 이어졌던 남베트남의 '6년 동안의 평화'는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 응오딘지엠의 독재에 분노한 남베트남 지식인 사회가 반발했다. 농민들은 공무원 부패와 실패한 토지개혁 때문에 불만스러워했고 불교도들은 정부가 가톨릭을 편애한다고 분개했다. 여기에 화교와 소수민족들은 중앙권력 강화과 지방 통제력 강화에 권리를 침해당했고 대도시에서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반 응오딘지엠 운동이 벌어졌다. 여기에 미국은 응오딘지엠이 공산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고 불만스러워했고 응오딘뉴의 성향과 미국이 충돌하면서 미국-응오딘지엠 정권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961년 1월엔 미국이 묵인한 가운데 쿠데타가 벌어졌고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북베트남은 이것으로 남부의 안정기가 끝났다고 판단, 평화적 해결이 필요없다고 결론짓고 1961년 2월 인민해방군을 결성하여 민족해방전선의 군대로 삼았다. 이로 인해 베트콩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