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병 (문단 편집) == [[파일:중국 국기.svg|height=25]]중국의 의병 == [[중국사]]에서도 이런 예를 볼 수 있는데,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 말 [[황건적]]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들은 나중에 여러 군웅[* 유비와 손견이 대표적이다.]의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시대]]에서 선비족을 격파한 [[동진]]의 명장 [[유유(송무제)|유유]]와 [[양(남조)|양나라]]의 장수 [[진패선]]은 자신들이 거둔 전공을 무기로 백성들의 명성과 지지를 얻어 나중에 [[송(육조)|송]]과 [[진(육조)|진]]을 세워 황제가 된다. 또한, [[당(통일왕조)|당]]나라는 황소의 난에서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 지방 절도사들의 할거로 멸망하게 된다. 이런 문제로 인해 중앙 정부에서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남송]] 시대에 [[금나라]]에 대항하여 의병을 이끌었던 [[악비]] 등은 충성하던 정부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리고 [[원나라]]가 [[남송]]을 침략 했을 때 남송의 의병에게 크게 당했고 비록 국체 였던 조씨 황가가 [[애산 전투]]에서 멸문지화 당해 나라는 멸망했지만 저항은 극심해 원나라가 [[장강]] 이남 지역 한족을 심히 탄압하는 계기가 된다. 명청 교체기 때엔 [[명나라]]의 잔존 정규군을 포함한 의병이 있어 [[청나라]]의 중원 정벌을 방해했다. [[남명]]이 북경 함락 이후 바로 건립되었지만 미약한 행정력과 황제들의 무능력으로 북경 이외 지역에 힘을 못써 이들은 무적(無的) 신분으로 청나라와 [[오삼계]]를 비롯한 항장들에게 맞서 양주 십일[* 현 [[양저우]] 지역의 명군이 청군과 맞서 싸우다 성이 함락된 이후 열흘 동안 청군의 학살이 일어났다. 양주십일기를 비롯한 기록이 남았다.]과 강음 대학살을 비롯해 피냄새 나는 저항을 이어갔다. 남명도 명조 시절 정규군과는 좀 다른 군대[* 대부분 전력이 약했고 정통성은 당연히 떨어졌다. 일단 가장 네임드가 [[정성공]]의 군대인데 정성공 부터가 아버지인 [[정지룡]]이 '''해적 출신''' 이었다.]가 있었고 청나라를 효과적으로 막아내 강남 지역 평정에 애를 먹였다.[* 오죽 그러니 같은 명조인이었던 [[오삼계]], 상가희, 경중명을 번왕으로 내세워 까다로왔던 [[운남]], [[광동]], [[복건]]을 다스리게 했고 [[강희제]] 때가 돼서야 삼번의 난을 겪고 과거 명조 전토를 청나라 영토 안에 넣었다.] [[청나라]] 대에는 [[태평천국의 난]]에 대항하여 [[증국번]]이 의병 활동을 하였고, 사실상 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청의 실질적 정규군 역할을 일부 담당했다. 증국번의 제자인 [[이홍장]]도 함께 활약했으며 이 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권력자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 의병들은 당시 정규군이었지만 쇠퇴한 [[팔기군]]을 대체, 실질적인 청의 군사력을 담당했지만 중앙 정부가 아닌 개인이 통솔했던 경우가 대다수라 군벌화되었다. 특히 군대의 유지 비용을 사재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경우엔 상당수의 의병 집단이 그대로 비적이 되었다. [[중국]] [[청나라]] 말기 나타난 군벌과 비적 집단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고 구 중국군이자 현 대만군의 모체인 [[국부군]]도 광동 지역 군벌이었는데다 현 중국군인 [[인민해방군]]의 원형인 [[홍군]]도 공산 군벌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