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안대군(이방석) (문단 편집) === [[홍무제]]의 사위가 될뻔하다 === [[홍무제]] 시절 [[명나라]]의 황녀와 혼인할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주원장이 먼저 [[태조(조선)|이성계]]에게 [[사돈]] 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6013_001|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기사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그 이후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이성계에게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돈 맺으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파투났다"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파투]]가 났다고 한다. >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개성 왕씨|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 하여 망하고 [[전주 이씨|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홍무제|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천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천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 -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4017_001|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아마도 정황상 주원장은 "혼례까지 하면 이성계가 지랄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이성계는 "혼례까지 할 정도면 [[요동]] 정도는 [[지참금]]으로 챙겨먹을 수 있을 것이다"~~가능할 리가 없잖아~~하고 서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파투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75045&exception_mode=recommend&page=1|#]][* 다만, 설령 이방석이 명나라 공주와 결혼했어도 무사히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대다수 [[사대부]]들은 자질이 검증된 [[태종(조선)|이방원]]을 더 선호하고 있었고 명나라에서도 [[정난의 변]]이라는 초대형 변수가 터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에 신경쓸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혼담이 완전히 파투나자마자 조선에서는 거의 곧바로인 1397년 6월부터는 [[제3차 요동정벌|요동정벌]] 논의가 본격화돼서 [[조준(조선)|조준]]이 반대하니까 [[남은]]이 "조준은 셈은 잘 세도 큰 일을 도모할 수 없다"며 비판한다거나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실제로 저 국혼이 성사되었다면 그 이후의 [[나비효과]]가 대단히 흥미진진했을 것인데 일단 주원장이 1398년 5월에 사망하기에 저 국혼만 성사됐으면 주원장이 죽자마자 8월에 터지는 [[정난의 변]]과 마찬가지로 8월에 터지는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선의 입장이 미묘해진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처갓집이 명나라 황실이 되면 원래 막내였고 나발이고 세자 이방석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질 테니 함부로 비비기도 힘들고 공식적으로 명나라와 척지고 요동정벌 하자는 것도 아니며 그거 핑계로 [[쿠데타]]도 무리니 1차 왕자의 난은 아무래도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고 대신 그렇게까지 명나라 황실이랑 가까워진 상태라면 아무래도 정난의 변에서는 조선이 [[건문제]]의 편을 안들 수가 없어진다. 주원장도 말년에 [[번왕]]들 따로 노는걸 눈치 못챈 것도 아니니 저 시점에 조선과 결혼 [[동맹]]을 했다 치면 당연히 건문제와 가까운 혈연으로 맺어졌을테고 그렇다면 장인의 나라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정난의 변에 조선이 개입을 할 수 밖에 없어질테니 말이다. 또한, [[조명관계]]에 있어서도 [[여몽관계]]처럼 조선이 명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조선의 국위선양과 후계자 이방석의 지위가 공고해지고 명나라 국정과 요동에 지분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강대국인 명나라가 후견국으로써 간섭이 더 심화되어 안 그래도 불안했던 조선 초기의 정국이 더욱 복잡해졌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