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양군 (문단 편집) === 대한제국기 활동 === 다른 종친들보다 나이가 비교적 어려서 그런지 [[조선|조선국]] 시절보다는 [[대한제국]] 시기에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898년([[광무]] 2년)에는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의 전작례[* 奠酌禮, 임금이 몸소 제사를 지내는 예.]와 작헌례[* 酌獻禮, 왕이나 왕비의 조상이나 문묘(文廟)에 모신 공자의 신위에 왕이 직접 예로써 제사지내던 예.] 때 축문을 읽어 [[상]]을 받았고 1899년(광무 3년) 8월, 시강원 부첨사[* 侍講院副詹事, 시강원은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이며 부첨사는 시강원의 관리 책임자이다.] 역임 중에는 [[일본]]의 [[황족]]이 한국을 방문할 때 맞이했다. 1899년(광무 3년) 9월 족보 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았다. [[황제]]의 4대손은 황족의 지위를 받는다는 예에 따라 의양도정(義陽都正)에 봉해졌다가 2달 뒤 다시 의양군(義陽君)으로 승격했다. 11월에는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해 이 후에도 여러 번 맡는다. 1901년(광무 5년)에는 3월 명헌태후[* [[헌종(조선)|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홍씨. 참고로 대한제국의 유일한 태후였다. 흔히 윤대비라 부르는 [[순정효황후]]는 나라 망한 뒤 허울 뿐인 이왕대비였을 뿐.]궁 대부에 임용되어 칙임관에 4등에 서임한다. 이는 훗날 1등까지 올라간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495447593915.jpg|width=100%]]}}} || || {{{#ffd800 [[에드워드 7세|{{{#ffd800 '''에드워드 7세'''}}}]] '''즉위식에 간 한국 사절단. 앞 줄 가운데 사람이 의양군 이재각.'''}}} || 또한 '''한국 황족 최초로 [[유럽]]에 간 기록을 세웠다.'''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특명 영국 대사에 임명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영국 [[런던]]을 방문하고 [[캐나다]] [[벤쿠버]]까지 거쳤던 것이다. 이 때 [[영국 왕실]]의 배려로 '''한국인 최초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했다.''' 다들 거대하고 웅장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일행 중 한 명은 어찌나 놀랐던지 기념 시까지 남기기도 했다.[* 이 사실은 1910년 이후 잊혀졌다가 1999년 4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방한을 맞아 사절단 중 한 명이었던 이종응의 증손녀 이해남과 남동생 이해석이 오랫동안 집에서 보관해오던 수행 기록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1903년(광무 7년) 1월에는 전선사 제조[* 典膳司. 조선 후기 궁내부에 딸린 관청으로 1895년 기존의 [[사옹원]](司饔院)을 개편한 것이 전선사이다. 제조는 총책임자.]를 겸임하였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는 훈 1등에 서훈되어 태극장을 하사받았으며 이화대수장(李花大綏章)을 거쳐 최종적으로 금척대수장(金尺大綏章)까지 수여받는다. 같은 해 9월에는 군부에서 포를 다루는 부서의 국장을 지냈다. 1905년(광무 9년) 2월에는 종정원경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3월 16일 특파 대사로 임명되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축하 사절단으로 다녀왔다. 5월에는 [[경부선]] 철도 개통식에 참석했고 7월에는 이 무렵 세워진 [[대한적십자사]]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후임은 [[의친왕|의친왕 이강]]이었고 1907년(광무 11년) 4월에 다시 의양군이 맡았다. [[한일병합]] 1년 전인 1909년([[융희]] 3년) 7월에 일본이 대한적십자사를 강제로 폐지하면서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한국 일본 황족 단체 사진.컬러 사진.png|width=100%]]}}} || || {{{#ffd800 '''뒷 줄 왼쪽부터''' [[흥친왕|{{{#ffd800 '''흥친왕 이재면'''}}}]], '''[[완순군|{{{#ffd800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영선군|{{{#ffd800 '''영선군 이준용'''}}}]].[br]'''앞 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노미야|{{{#ffd800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순종(대한제국)|{{{#ffd800 '''순종황제 이척'''}}}]], [[다이쇼 덴노|{{{#ffd800 '''요시히토 황태자'''}}}]], [[영친왕|{{{#ffd800 '''의민태자 이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2b9c4c1-cef1-4b6b-a406-3d6b004c4328.jpg|width=100%]]}}} || || {{{#ffd800 '''[[1909년|{{{#ffd800 '''1909년'''}}}]] [[순종(대한제국)|{{{#ffd800 '''순종'''}}}]]이 순행에서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ffd800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br]중앙은 순종. 오른쪽으로 의양군 이재각, '''[[민병석(1858)|{{{#ffd800 '''민병석'''}}}]], [[조중응|{{{#ffd800 '''조중응'''}}}]], [[김윤식(조선)|{{{#ffd800 '''김윤식'''}}}]], [[이지용|{{{#ffd800 '''이지용'''}}}]], [[조민희(1859)|{{{#ffd800 '''조민희'''}}}]]''', 고희성. 순종의 뒤는 '''[[이병무|{{{#ffd800 '''이병무'''}}}]], [[윤덕영|{{{#ffd800 '''윤덕영'''}}}]]. '''순종의 왼쪽으로''' [[이토 히로부미|{{{#ffd800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ffd800 '''이완용'''}}}]], [[임선준|{{{#ffd800 '''임선준'''}}}]], [[고영희|{{{#ffd800 '''고영희'''}}}]], [[송병준|{{{#ffd800 '''송병준'''}}}]], [[박제순|{{{#ffd800 '''박제순'''}}}]].}}} || 이후 육군 참장(陸軍參將)과 민간 단체인 상공근무사(商工勤務社)의 회장을 맡았으며 1908년([[융희]] 2년)에는 계산학교 교장 직을 역임했다. 1909년(융희 3년) 1월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대구광역시|대구]], [[부산광역시|부산]], [[마산]] 등을 시찰할 때 옆에서 모셨다. 1910년(융희 4년) 8월에 종1품에 가자되었으나 얼마 뒤 [[경술국치|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그도 황족의 지위를 잃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