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종(고려) (문단 편집) == 기타 == * 《[[고려사절요]]》엔 [[금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사신이 [[김돈중]]의 관상을 봐주었다는 말을 듣고, 의종이 자신의 관상도 봐 달라고 하면서 수명을 물었는데, 사신은 "왕께서는 수명이 셀 수 없을 만큼 길고 기셔서, [[무신정변|조정의 노•소 신료들이 다 죽고 난 뒤에야]] '''임천지환'''(任川之患, 물가에 다다라서 생기는 고민)이 생길 듯 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그 말이 제대로 실현되고야 말았다. * 언젠가 거북이 모양을 한 금덩이가 발견되어 의종에게 진상된 적이 있었다. 신하들은 의종의 성덕(聖德)에 감응해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 '대평호문지주'(大平好文之主)라는 거창한 [[존호]]가 있었다. 신하들이 의종이 쓴 시를 보고 바친 존호다. * 의외로 의종은 손자까지 보아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고려사]]》 <[[정중부]] 열전>, 《[[고려사절요]]》엔 의종의 손자를 [[황태손|태손]](太孫)이라 부르고 있다. 《고려사》 <의종 세가>엔 단순히 왕손(王孫)으로만 등장한다. 의종의 태손은 고려 최초의 태손이다. 두 번째는 [[고종(고려)|고종]]의 태손인 제25대 [[충렬왕]]이다. * 의종은 기존의 5묘 9실제 [[태묘]]를 7묘 9실제 태묘로 바꾸어 완전한 천자식 태묘를 완성한 임금이다. 그동안 고려는 5묘제를 쓰면서 방을 9개로 맞추고, [[묘호]]를 올려, 불완전한 천자식 종묘를 사용해왔다. 이후 고려의 태묘는 [[원종(고려)|원종]] 대까지 7묘 9실제가 유지된다. 다만 불완전하다는 단정은 주나라 예법을 절대시한 현대인이 과거의 생활상을 멋대로 재단하여 생긴 선입견으로 중국 역시도 국초에는 7묘를 전부 채우지 못했다. 즉 예법이란 그 자체가 사회를 완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막론하고 당시 편의와 목적에 따른 제도가 탄력적으로 운용되었을 뿐이다. * 의종은 종묘에 별묘(別廟)를 추가한 임금이기도 하다. 태묘엔 의종까지 이어지는 정통성을 가진 국왕을 모섰다. 바로 1대 태조(건국군주), 2대 혜종(태조 공인 후계자), 8대 현종(중흥군주 및 왕실의 중시조), 11대 문종(전성기 및 왕실의 중시조), 12대 순종(문종 공인 후계자), 13대 선종(숙종이 '양위' 받은 국왕, 14대 헌종은 무시됐다.), 15대 숙종(선종 '공인' 후계자, 의종의 3대조), 16대 예종(숙종 공인 후계자, 의종의 2대조), 17대 인종(예종 공인 후계자, 의종의 부왕). 그 외 의종의 정통성과는 큰 연관이 없는 국왕인 3대 정종, 4대 광종, 5대 경종, 6대 성종, 7대 목종, 9대 덕종, 10대 정종, 14대 헌종은 무시되어 신위를 없애는 대신 별묘로 옮겨 계속 제사를 지냈다. 원래는 재위 중인 국왕의 정통성이나 직계와 관련이 없는 임금은 신위를 꺼내 땅에 묻어야 하지만 따로 모아 제사지내는 방식을 정한 것이다. 나중에 이 방식은 조선왕조의 [[세종대왕]]이 사용한다. * 의종이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서를 바친 적이 있었다. 당시 금은 고려의 상국이었으니 고려는 신하의 예로 국서 양식을 갖춰야 했다. 그러나 의종은 표문(신하가 천자에게 보내는 글)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고 국서를 가져간 사신을 가리켜 '배신'(陪臣)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의종은 금 황제의 신하(제후)이니 의종의 신하는 신하의 신하, 즉 배신(陪臣)이다. 하지만 의종은 이름을 쓰기 거부하고 배신이라고도 안해 표문의 양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 의종과 [[남송]]의 간신 [[진회]]는 이상한 인연이 있었다. 고려의 [[이심(고려)|이심]]이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진회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엔 고려의 지도가 동봉되어 있었는데, 이심은 진회에게 '송은 금을 공격하겠단 핑계로 고려에게 길을 빌려달라 하고 우리가 안에서 도와주면 고려를 차지할 수 있다.'란 내용을 썼지만, 편지는 바다를 건너지도 못하고 중간에 뺏겨 의종에게 전달됐다. 이심은 당연히 죽고 가족은 섬에 유배당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계획인데 일단 남송이 바다를 건너 고려를 공격할만한 군사력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심지어 금나라가 호시탐탐 남송을 노려보고 있는 와중에 남송이 군대를 빼 고려로 보낸다는 모험을 했을지도 의문이다. 또한 고려가 아무리 약해졌어도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데 왜 이런 바보같은 반란 도모를 시도했는지 알 수 없다. 이 일은 의종이 재위한 지 얼마 안된 2년 차에 일어나 고려는 아직 인종 대의 국력이 있었다. * 의종 대엔 수많은 신하들이 그의 환심을 사 지위를 올리고자 했다. 한번은 귀족 자제들과 학교 유생들간에 아부 배틀이 벌어진 적이 있다. 귀족 자제들은 막강한 재력으로 보석, 그림, 귀중품을 준비하고 서커스단을 데리고 와 왕이 남송, 여진, 탐라국, 일본 등에게서 조공을 받는 행사를 재현해 귀금속과 청색, 홍색 일산을 바치고 고급 말 2마리를 바쳤다. 반면 학교 유생들은 섭외 능력이 떨어지고 재력도 없으니 늘 진상품이 적었다. 《고려사》 <의종 세가>의 표현으론 100의 1도 안되는 양만 바쳤다고 한다. 결국 학교 유생들은 빚을 지고서 고급 말 6마리를 바쳤다. 하지만 이후 유생들은 계속 빚을 갚지 못해 늘 채무자들에게 욕을 먹어 백성들이 조롱했다고 한다. * 서경유수 [[조위총]]이 아니었으면 [[묘호]]나 [[시호]], [[능호]]는커녕 장례식조차 받지 못할 뻔했다. 《고려사》 <정중부 열전>, <조위총 열전>에 따르면 의종은 죽은 뒤 시체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다가 누군가가 겨우 시냇가에 묻었다고 한다. 조위총이 의종을 핑곗거리로 내세우지 않았으면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 중방의 무신들은 절대 그를 굳이 언급하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대승 같이 중방 소속이 아닌 자들이 대놓고 이의민을 왕을 죽인 역적이라 비난한 걸 보면 중방이 약해지고 묘호와 시호가 올려졌을 가능성도 높다. * 의종이 유배될 당시 동경([[경주시]])은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정과정]]>의 작가 [[정서(고려)|정서]]가 있던 곳이기도 했다. 정서는 [[정항]]과 강릉군부인의 4남으로 [[왕국모]]의 외손자였다. 심지어 의종이 거제에 온 뒤 한 달 뒤에 정서가 복권됐으니 같은 지역에서 같이 산 것이다. * [[고려]]시대의 문집인 《[[보한집]]》 <권중>엔 의종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의종이 [[경주시|남황(南荒)]]으로 옮겨졌을 때 이기(李琪)라는 화가가 의종의 [[어진]]을 그렸지만, 이름을 붙히는 등 마감을 하지 않고, 단지 동도초당(東都草堂)이란 곳에 걸어둔 채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시를 보면 이기가 그린 의종 어진은 [[곤룡포]]를 입은 모습이 아니라 복두에 학의, 즉 평복을 입은 초라한 모습이었던 걸로 보인다. * 고려시대의 문집인 《[[파한집]]》 <권하>에도 의종의 이야기가 나온다. 의종이 조령을 내려 고려 각지에 있는 사원, 역참에 있는 시를 수집해오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장관급 직위를 맡고 있던 신하가 썼던 시가 의종에게 보내졌다. 시의 내용은 대략 '밑을 쥐어짜 위에게 잘보이는 것이 풍속이 됐고, 온나라가 따르고 있다. 뭐가 부끄럽냐? 올바른 일을 하는게 맞지.'였는데 의종을 크게 비꼬고 있었다. 의종은 이 시를 읽고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고, 좌•우의 신하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서워 겁을 먹었다고 한다. 글에 따르면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어떤 신하 한 명이 관례를 깨고 두 차례나 변방에 나가야 했을 뿐. * 의종의 왕릉인 [[희릉]]은 현재 유실 상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