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주군 (문단 편집) == 역사 == 예로부터 한국사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중요했던 요충지이다. [[고려]]시대에도 [[압록강]]의 검동도(黔同島)에 요충지인 내원성(來遠城)이 위치해 있었다. 내원성은 [[삼국시대]] [[고구려]]부터 존재하였던 성이었으며 [[남북국시대]]에는 [[발해]]의 관할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후 [[고려]] 대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의 [[요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제1차 여요전쟁]] 때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가 고려에 속하게 되었지만, 내원성까지 차지하지는 못하고 내원성보다 남쪽에 위치한 흥화진(의주군 위원면)이 강동 6주의 북쪽 경계였다. 내원성은 [[여진족]]과 [[북송]]의 통교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요나라]]가 관할하고 있다가, [[금나라]]가 요를 멸망시킬 때 쯤에야 고려가 점령하게 된다.[* 참고로 성을 점령한 경위가 좀 웃긴데, [[예종(고려)|고려 예종]]대에 성을 지키고 있던 [[요나라]]의 통군(統軍) 야율녕(耶律寧)과 내원성자사(來遠城刺史) 상효손(常孝孫)이 [[금나라]]의 공세가 심해지자 [[고려]]에 "성을 잠시 맡길 테니 나중에 다시 돌려달라"고 당부하고 나서 바닷길로 탈출했고, 고려는 주인이 없는 성을 그대로 접수했다. [[멸망|물론 요나라가 내원성을 돌려받을 일은 영원히 없었다]](...).] 또 여요전쟁 당시 요는 강동 6주 탈취를 위해 내원성에서 [[압록강]] 건너 압록강 좌안에 보주성(保州城)[* 후의 포주성(抱州城)]을 쌓았는데, 역시 운명은 내원성과 같았다. 그리고 요를 멸망시키고 세운 여진족의 금은 사대를 조건으로 고려가 두 성을 점유하는 걸 인정하면서 의주 일대가 확실하게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의주부|의주목]]으로 불리다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조선)|선조]]가 머물렀다는 이유 등으로 '부'로 승격되어 1910년 [[경술국치]] 당시까지 [[의주부]]라 불리게 되었다. 위치 특성상 [[여몽전쟁]], [[정묘호란]] 등 북방민족에게 침략당했던 전쟁에선 제일 먼저 점령당했다. 반면 [[임진왜란|조선 선조 시절 일본군이 침공했을 때]]는 최후방이었고, [[선조(조선)|선조]]가 피난간 지역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군사적 요충성과 무역거점으로 융성했던 것으로 인해 국경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지방행정 단위였던 부(府)[* [[평양부|평양]]과 동급이었다(!).]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관찰사와 동급이었던 종2품 부윤(府尹)이 관할하였다. 과거에는 [[신의주시]]까지 포함하였던 지방이다. 전통적으로 의주읍은 [[중국]]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해 왔으나, 이후 [[일제강점기]]에 [[경의선]]이 놓이게 되면서 신의주-[[단둥시]] 간 교통로가 발달하며 [[주객전도|관문 역할은 신의주에게 내주고 오히려 신의주의 위성도시 역할로 변모했다.]] [[2008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의주군의 인구는 약 11만명으로, 군 단위 지역치고는 인구가 적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번성했던 역사에 비하면 현대의 의주는 확실히 쇠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