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친왕 (문단 편집) ==== 상하이 임시정부 망명 시도 ==== [[1919년]] 11월 9일 [[나창헌]] 등의 주도로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하려던 사건이 가장 유명한데, 같이 거사를 계획한 단체의 이름을 따서 [[대동단 사건]]이라고도 한다. [[3.1 운동]] 직후인 [[4월 11일]],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은 드디어 세를 규합해 [[상하이|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정식으로 창설한다. 이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아직 미약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상해 임시정부에 내부적으로는 구심점, 대외적으로는 정당성을 강화하고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관심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의친왕 [[망명]]을 구체적으로 계획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대한제국/황실|황족]]의 입을 통해서 [[한국인]]이 마음으로 [[일본제국|일본]]의 [[식민지|통치]]를 원한다는 [[일본제국|일본]]의 선전전에 대항할 수 있을 거라 기대되었다. 게다가 의친왕은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대한제국/황실|황족]]으로서의 [[특권]]과 [[예우]]를 버리겠다고 스스로 선언했다. >1. 일본은 몇 명의 간신과 부동하여 나의 [[고종(대한제국)|부황(父皇)]]과 [[명성황후|모후(母后)]]를 시해하였으니, 이 원통한 사정을 열국에 호소할 것이다. > >2. '''[[3.1운동|3월 1일 이래로 전 국민이 빈손으로 독립을 절규하여 외치는데]]''' 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와 인도를 무시하고 학살을 자행하니, 우리 국민들은 백절불굴의 기세로 [[독립]]을 요구하는 애국의 열혈이 더욱더욱 들끓어 국민의 정신이 결코 [[일본제국|일본]]에 동화되지 아니할 것을 선포할 것이다. > >3.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10년 전후에 제반조약으로 우리의 국토를 합병한 것은 간사한 도적을 이용하여 협박하고, 강제 체결한 것으로 결코 나의 부황(父皇)이 긍종(肯從)하심이 아님을 내가 확실히 하는 바이다. 그러니 이를 세계에 공포할 것이다. > >4. 나 역시 한국 국민의 한 사람(一民)이라. '''나는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으로 나라를 잃고 일본의 황족(皇族)이 되는것을 원치 아니한다. '''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가 성립된 당지에 나아가서 정부의 제공과 더불어 동심하여 생사를 같이 하여 우리나라의 완전 독립에 노력하여 동포들의 고심의 만분의 일이라로 도움이 되고자 하노니, '''나의 이와 같은 결심은 하나인즉 복수를 위함이요, 또 하나인즉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 >---- >- 《[[독립신문#s-2]]》에 발표된 의친왕의 성명. 김병조 《한국독립운동사략-의친왕의 피체》 [[1919년]] [[11월 20일]]자 《[[독립신문#s-2]]》에 의친왕의 성명이 실렸다. 내용은 ''나도 한국의 일민(一民)이라 차라리 독립된 한국의 일 서민이 될지언정, 우리나라를 병탄한 일본의 황족이 됨을 원치 않는 바이며 반드시 임시정부 제공(諸公)과 악수 동심하여 사생간에 광복에 힘을 다하여 여러 동포가 고심하는 만의 일이라도 보조하려 하는 것이니 나의 이 결심은 하나는 자가(自家)의 복수를 위한 것이며 하나는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함이라.''[[https://e-gonghun.mpva.go.kr/openViewer.do?hisCode=PV_DO&bookCode=0004&itemCode=002.002.002.001&pageNo=474|였다.]] 이전부터 의친왕 이강은 [[한국독립운동|독립운동]] 세력과 접촉한다든지 [[독립운동]] 자금 지원이 있었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동년 봄에 [[김가진]]이 상해 망명을 시도해 성공하는 일이 발생했다. 김가진은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까지 받은 인물이었기에 일본으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국내(한반도) 주요인사들에 대한 감시/감독이 더 강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에 고무되어 대동단이라는 비밀결사의 전협[* 옛날에 부평군수를 지낸], 최익환 등은 아예 더 고위급 인사, 그러니까 황족의 망명을 도모해보자 결심했고, 사동궁(의친왕의 사저)에 자주 들락거리는 인물을 통해 의친왕과의 접선에 성공, 의친왕은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 남루한 농부 차림에 수염까지 붙이는 등 변장한 뒤 거처를 탈출했다. 그 날 밤 10시 쯤 궁의 후문을 감시하던 [[일본인]] 리와가 어둠속에서 의친왕과 비슷한 용모의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급히 시내로 향하는 것을 보고 이를 미행했으나, 이동문 부근에서 이들을 놓쳤다.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고 이에 궁내 사무관 구로사와가 결재를 핑계로 의친왕을 만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거듭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막무가내로 의친왕을 만나려 했고, 결국 의친왕의 탈출은 발각되고 만다. 이에 [[일본제국|일본]]은 필사적으로 의친왕의 행방을 계속 추적했다. 의친왕 일행은 [[11월 10일]] 새벽, [[청운동]]과 [[세검정]]을 넘어 [[경성부|서울]]을 빠져나왔고,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가 남긴 150만원의 [[채권]]을 전달받는데 성공하는 등 일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결국 의친왕은 11일 [[만주]] 안동[* 지금의 중국 [[단둥시|단둥]].]에서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요네야마 경무관에게 적발되어 붙잡히게 되고,[* 당시 기록에 따르면 요네야마가 변장한 의친왕을 발견하자 바로 다가가 "어디를 가고 계십니까 전하?"라고 말하며 붙들었다고 한다.] 목표 접선처인 [[이륭양행]][*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계 영국인인 [[조지 루이스 쇼]]가 단둥에 세운 무역회사로 표면적으로는 영국인의 사업체지만, 실제로는 상해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의 사무소가 이곳에 설치되어 독립운동 자금 수합처가 되기도 했으며, 중국으로 탈출하는 독립운동가들의 교통편을 지원해주기도 했다.]을 불과 2km를 코앞에 두고, [[상해임시정부]]행 탈출은 결국 아깝께 실패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