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친왕 (문단 편집) ==== 이후 ==== 이후 [[일본제국|일본]]은 그에게서 [[한반도]] 내에서의 여행의 자유[* 당시는 [[대한제국/황실|황족]]에게 허용된 유일한 [[특권]]이었다.]를 빼앗아 사실상 강제 [[연금]](구금) 당했다. 이 시기에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신분상 불문율에 붙혀져 사법 처벌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의친왕은 비록 명목상일지언정 엄연히 구 [[대한제국]] [[대한제국/황사|황족]]이므로 [[일본 제국]]에서 예우해야 하는 최상위특권 계급이었기에 천하의 [[일본 제국|일제]]조차 [[대한제국|한국]] [[대한제국/황실|황실]] 사람에게는 사법적 제재를 가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의친왕 본인은 끝까지 일제에게 예우받기를 꺼렸지만.] 그런데 그는 이런 상태에서도 대동단 총재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했다. 이후, 총독부 관사에 연금된 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친일로 전향) 강요를 받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일본제국|일본]] 측의 수사 기록에 의하면, 의친왕은 자의로 탈출한 것이 아니고 [[돈]]이 궁하던 의친왕이 일금 3만원을 빌려준다는 꾐에 넘어가 궁을 몰래 나섰다가 [[납치]]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3.1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의 사정과 이후 [[일본제국|일본]]이 의친왕에게 대한 태도를 보면, 사실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가뜩이나 뒤숭숭하던 차에 [[조선]] 땅에 거처하면서 [[대한제국/황실|황족]] 중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당시의 [[신문]] 광고나 전단을 보면 그저 '전하가 칭찬하신 고무신', '전하가 애용하는 위장약' 등의 광고 카피가 보이는데 당시에는 앞에 아무 말도 없이 '전하'(殿下)라고 하면 의친왕을 가리켰다고 한다. 광고에까지 이용될 정도의 인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 임시정부]]로 탈출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본제국|일본]]이 수사 기록을 [[은폐]], [[조작]]했던 것이다. 물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의친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려 했다고 하나같이 입모아 말했다. 물론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일본제국|일본]] 측의 수사 기록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행적과 잘 맞지 않는데다가, 적어도 그의 탈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가 개입된 건 확실해 보인다. 여하간 의친왕의 상하이 탈출 기도사건 이후 일본 측의 감시는 한 층 삼엄해졌다. >독립운동에 관련된 의친왕의 처치를 여하히 할가하고 기간 일본 국내성과 [[조선 총독부|총독부]]가 노심초사 한 결과 일본으로 천궁케하기로 결정하고 의친왕에 대한 대우문제는 현재 총독부에서 연구중이다. >---- >- 《[[독립신문#s-2]]》, 제39호[[https://archive.much.go.kr/archive/newspaper/listArticle.do|#]] >적의 엄호중에 기거. [[조선총독부]] 내 녹천정(綠泉亭) 으로 환궁한 의친왕은 왕비의 거처하던 밀실의 내당에 유폐되고 왕비는 (사랑)채에 이사하다. >의친왕의 거실 네 방향(四周) 7개 방에는 적 경사가 밤낮(晝夜) 순찰(守直)하고 궁외에 재하던 인원은 전부(全數) 궁내 에 집거(集居)게 하여 일절내외(一切內外)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의친왕의 별실 수인당 김홍인은 궁내를 돌아다니다 적 사무관의 공갈에 기겁하야 落胎, 病席에 눕다. >---- >- 《[[독립신문#s-2]]》, 제41호[[https://archive.much.go.kr/archive/newspaper/listArticle.do|#]] 사건 이후 총독부는 의친왕을 일본으로 강제 천거할 것을 고려하기도했다. 이후 의친왕은 이전 통감부 관저로 쓰던 총독부 부속 녹천정(綠泉亭)에으로 강제 이궁했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의 청원 사건에서 연명부에 [[대한제국/황실|황족]] 대표로 이름이 올랐다. 그런데 이 청원서는 실제로 사람들의 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이름을 올린 위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청원서에 따르면 [[서상일]] 등 항일운동가들과 민족종교였던 [[천도교]] 등 민족세력 뿐만 아니라 [[박영효]]와 같은 [[친일파]]들, 마찬가지로 친일괴뢰였던 [[시천교]] 등까지 13도와 260여개 군과 각 사회 단체의 대표자 372명이 뜻을 모아 [[일본제국|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고 서명을 했다는 것이니, 그 자체로 이미 택도 없는 소리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서명과 필체를 확인하여 위작이라고 결론내리고 연명부에 이름을 올린 인사들에 대한 처벌없이 조사를 마무리지었으나, 여하여튼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이 건의서와 연명부는 [[이승만]]에 의해 [[워싱턴]] 회의에 제출되었다. 경주 최 부잣집 12대 마지막 부자로 알려진 [[최준(1884)|최준]]을 돕기도 했다.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에 따르면 최준의 호 문파(汶坡)도 의친왕이 직접 지어준 것이며, 최준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막대한 자금을 송금해 주다가 정작 자신의 백산 무역 회사가 100여만 원의 [[부채]]를 급히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채무]]를 조정하는데 의친왕이 직접 발벗고 나섰다는 것이다. 의친왕은 [[1930년]] [[6월 12일]], [[왕공족|공족]]으로서의 작위와 전 재산을 장남인 [[모모야마 켄이치|이건(李鍵)]]에게 넘겼다. 이에 대해선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아, 그가 하는 일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일본 제국|일제]]에 의해 작위가 박탈당한 거라는 주장과 일제의 압력에 의해 의친왕 스스로가 물러난 거라는 주장이 있다. 어쨌든 이후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제국|일본]] [[규슈|큐슈 지역]]에 옮겨가서 살게 되었으나 나중에 [[도쿄]]로 옮겨졌다. 자료에 의하면 이 때 [[일본어]]로 쓴 각서가 있는데 "친왕은 은퇴하고 공(公)의 칭호와 모든 재산을 장남인 [[모모야마 켄이치|이건]]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일본제국|일본]]에 머물기로 하며, [[일본제국|일본]] 국내에는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다. 의친왕에게는 당시 [[화폐]]로 30만원을 지불하고 [[의친왕비]]에게는 생활비로 1년에 12만원씩을 지불한다"는 등의 내용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장남 [[모모야마 켄이치|이건]]과 사이가 나빴다는 증언이 있다. 의친왕의 5녀인 [[이해경]]은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서 "차남 [[이우]]는 총애했음에도 [[모모야마 켄이치|이건]]은 매우 미워했다"고 술회했다. [[술]]을 마시면 [[모모야마 켄이치|이건]]에게 '''"[[일본제국|일본]]으로 가서 살아라!"'''며 버럭 화를 냈으며, [[이우]]가 귀국할 때는 직접 [[서울역|경성역]]으로 마중 나가놓고 [[모모야마 켄이치|이건]]이 귀국할 때엔 일부러 피하는 등 노골적인 차별 대우가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만큼, [[일본 제국|일제]]에 부정적이었던 [[이우]]와 달리 일제에 순종했던 [[모모야마 켄이치|이건]]이 미덥지 않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실제로 [[모모야마 켄이치|이건]]은 [[대한제국]] [[대한제국/황사|황족]] 중에서 친일 인물이었다. “[[일본 황실]]의 태도에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한국 황실에는 냉담함 만이 있다”라고 언급 하거나 [[1945년]] [[8월 12일]], 황족 회의에서 [[천황]] [[히로히토]]를 보고 “그 말투며 태도며 실로 경복하기에 족한 것이 있었다”라 칭송했으며, 동생 [[이우]]가 어떻게든 [[일본인]]을 거부하고 [[조선인]] [[박찬주(교육자)|박찬주]][* [[박영효]]의 서손녀.]와 [[결혼]]한 것과 달리 자신은 [[일본인]] 마츠다이라 요시코(松平佳子)[* [[이방자]] 여사의 이종사촌 여동생.]와 순순히 [[결혼]]했다. 또, 후에는 [[일본제국|일본]]으로 [[귀화]]까지 하면서 [[다이쇼 덴노]]가 묻힌 '''모모야마(桃山)'''를 [[성씨]]로 정하며 “아버지와 연을 끊고 싶어 귀화했다”고 하는 등, 노골적으로 자신을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 여겨 아버지인 의친왕과 사이가 나빴던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610100031|인물이다.]] [[1930년대]]에 [[귀국]]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때는 알 수 없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씨가 없는 [[일본 황실]]의 예에 따라서, [[대한제국/황실|대한제국 황족]]들에게는 처음부터 [[창씨개명]]이 강요는커녕 아예 말이 한번도 나온 적도 없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